우리는 8.15를 기억하고 있는가
2007-08-18 글_김영란 차장
선열들의 희생정신과 투지를 이어받아 자주 국가로 이어나가야
해마다 8월이면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분주하게 떠난다. 우리나라 4대 국경일 중 하나인 광복절은 ‘휴일’로만 인식될 뿐 젊은 세대로 갈수록 광복절에 대한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다. 민족의식과 자유의식이 결여되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시간 탓으로 돌리기엔 과거에서 미래의 비전을 그려나가는 역사적 관점에서라도 우리의 우매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무차별하게 도륙되고 철저하게 인권마저 짓밟혔던 민족들의 피 맺힌 애환을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조국해방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던졌던 우국선열들의 살신성인과 주권없는 국민들의 통한을 뼛속 깊이 되새겨봐야 할 때이다.
올해로 광복 62주년을 맞는 8.15광복절은 어느 해보다 더욱 그 의미가 깊다. 비록 시범운행이었지만 남북으로 끊어졌던 철도가 다시 오가고,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온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며 다시금 민족애를 고취시켰던 역사적인 일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광복 62주년이자 대한민국 건국 59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대내외적으로 보여준 부분이 무엇이냐는 점에서 많은 회고적인 의견들이 파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래한국의 비전을 제시할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더라도 퇴색되어 있는 민족의식과 자주의식에 대해 새로이 자각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갈수록 역사의식이 퇴색되어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영원한 과제로 남아 있다. 선열들의 숙원이었던 해방에 대한 정신을 어떻게 이어가야하는가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해방을 위한 어떠한 역사적 노력이 있었는지 명확히 알아야 할 부분이다. 미래의 발전도 결국은 확고한 역사의식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조국해방을 위한 자주적 항일운동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으로 시작된 35년간의 일제강점기는 민족의 역사와 전통성이 철저히 단절된 치욕의 시간들이었다. 한반도 점령을 위해 시간을 틈타왔던 일본은 합병조약을 통해 우리나라를 철저히 식민지화하였다. 이러한 바탕에는 한국위정자들의 무능과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과 이용구, 송병준 등으로 대표되는 일진회(一進會) 등 매국노들의 반역행위도 큰 몫을 하였다. 또한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미국·영국 등 열강국들의 묵인도 일본의 야욕에 일조를 한 부분이었다. 일본은 한국병합을 달성한 뒤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구체적인 한반도 경영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정책의 변동을 행사해 왔는데, 궁극적으로는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탄압, 영구예속화를 위한 고유성 말살, 우민화(愚民化), 철저한 경제적 수탈 등이 그 핵심이었다. 무단통치로 시작된 일제강점기 35년은 문화정치 시기를 거처 한반도의 병참기지화 및 전시동원 시기로 이어졌다. 한민족의 생명과 인권에 대해 짐승만큼도 고려하지 않았던 일제의 횡포아래 많은 민초들은 고통을 겪었으며, 현재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군위안부에 이르기까지 일제는 완전한 식민통치를 위해 갖가지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 속에서 우리의 선열들은 민족의 해방을 앞당기기 위한 노력을 안팎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안전마저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종 조직을 통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1930년대 후반 국내의 각 민족해방운동세력들은 시국의 어수선함을 틈타 무장봉기를 통해 조국의 해방을 쟁취한다는 전략들을 세워왔다. 1944년 말 결성된 공산주의자협의회는 국외 무장세력과들과 협력하여 남만주와 서북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일 계획을 치밀하게 계획했다. 또한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운동 비밀결사대인 건국동맹은 전국적 범위의 노농군을 편성한다는 계획 아래 1945년 봄 공산주의자협의회와 함께 군사위원회를 조직한 후, 전국을 8개 지구로 나누어 책임자를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해방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45년에 들어서면서 국외의 무장부대는 국내 진공을 준비하였고, 광복군은 국내 침투를 위해 미군 OSS 특수부대와 함께 훈련을 받기도 했다. 또한 소련에서 군정훈련과 소부대 파견활동을 벌이고 있던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의 조선인 유격대원들을 1945년 7월 조선공작단으로 조직하였으며, 일부 대원은 8월 9일 이래 소련군과 더불어 국경과 조선 동북부 해안지방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조선의용군은 1944년 1월이래 주력부대를 연안으로 이동시켜 정치군사교육과 훈련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 기라성같은 독립군들의 조국해방을 위한 활약은 비록 자주적으로 얻어낸 해방은 아니었으나, 조국해방운동에 있어서만큼은 자주적인 항일운동으로 평가받으며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민족해방의 선구자, 광복군
일제 강점기 하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남의 나라에 세워진 상태였고, 정식 군대를 두고 무장활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1940년 이전까지는 각자 흩어져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해 오는데 그쳤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하의 독립군은 군사활동적인 면도 있었지만, 일제에 맞서는 의열활동을 하는 항일단체로서의 의미가 더 깊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를 계기로 광복군 조직의 초석을 다지게 된 광복군은 명실공이 대한민국 군대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민족의 군대였다.
상하이와 만주를 거점으로 각각 독립적 항일운동을 전개해 왔던 독립군들은 정부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불안정한 상황과 일본의 방해, 주변국들의 비협조적로 인하여 제대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군들과 중국 각지에서 활약하던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1940년 마침내 예하 정규군대인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광복군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창설된 군대가 아니라, 1919년 이후 1930년까지 1단계, 1931년 이후 1936년까지 2단계, 1937년 이후 1945년 8.15광복 때까지 무려 3단계를 거쳐 이뤄낸 쾌거였다. 또한 항일군대로서 민족해방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1940년 11월, 황학수를 비롯한 군사특파단원들이 핵심을 이루었던 광복군총사령부 설치를 시작으로 한국광복군은 3개 지대로 편제되어 대대적인 조직정비에 들어갔다. 어렵고 힘든 정세 속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조직 구축에 대한 집념과 의지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광복군의 활약
광복군은 병력인원을 증강시켜 부대규모를 확대하고 발전해 나가는데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고 ‘창립 1개년 후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것을 당면목표로 설정하였다. 국내, 만주, 중국관 내 등지에 있는 모든 한인장정들을 모집해서 적지에 각 대원들이 잠입하여 공작거점을 마련하고, 공작거점을 기반으로 지역 한인청년들을 포섭하여 광복군 지역으로 유도해 오는 역할을 시작으로 활동을 전개해 갔다. 이러한 초기적 활동은 1940년 9월 30여 명으로 창설된 광복군이 1945년 8월에는 총사령부를 비롯하여 최소한 7백여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한 군대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광복군은 단순히 항일 군대로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적 활동도 병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광복군의 창설 사실과 그 존재를 알리고 활동상을 국내·외에 알려,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기 위한 선전활동도 펴 나갔다. 광복군은 창설 후인 1941년 2월 기관지인 ‘광복’을 창간하여 광복군에 대한 선전과 홍보를 시작으로 한국어본, 중국어본의 두 종류로 발간함으로써 중국 내 교포 및 행정·교육·군사·언론기관에 배포하여 큰 선전효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방송, 전단 살포, 연극공연, 음악활동 등을 통해 3·1절이나 광복군 창설 기념일 및 중요 행사가 있을 때 기념 선언문과 성명서를 발표하여 선전하기도 했다.
일제가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되고, 광복군은 영국과 미국 첩보기구와 연계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격전지였던 인도 미얀마에서 수송로가 막힌 영국군을 도와 훈련된 광복군을 지원하며 그 후로도 2년 동안 대일전쟁을 지속해 왔다. 한편,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와도 군사합작을 공동으로 추진하여 일명 ‘독수리작전’을 전개함으로써 국내에서 첩보활동과 게릴라작전을 활발히 펴나갔다.
국난극복 의지와 민족 저력을 발판으로 남북통일로
1945년 8월 15일. 굴욕과 치욕의 일제강점기가 마침내 막을 내리는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연합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만 것이다. 35년간의 일제 식민통치가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외형적으로 본다면 단순히 열강들의 싸움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진 ‘행운’같은 일로 보이나, 내적인 실상은 그와 다르다. 광복군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려는 자주적 독립의지로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협조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보였으며, 국내 진공 작전의 시도는 그 성과와 실현을 차지하고서라도 민족해방의 선구자로 나선 광복군의 결연한 의지와 투지를 엿 볼 수 있게 한다. 영국군, 미국군과의 OSS 공동작전을 펴 나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 활동 가운데에서 일본이 먼저 항복을 한 까닭에 그 실행이 무산되었을 뿐이다. 광복군은 국내·외적으로 어렵고 험난한 상황에서 창군되어 순탄하지 않은 행보를 걸어왔다. 하지만, 그 모든 고난을 겪어내고 해방을 이루는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 온 광복군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해방이 더더욱 의미가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20여 년 동안 제대로 된 군대하나 갖추지 못했던 상황에서 이러한 우수한 군대를 창군했다는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가장 눈부신 성과라 할 수 있다.
‘8·15 광복절’이 특별한 것은 압제로부터의 벗어났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나라 잃은 고통을 후손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그들의 피맺힌 절규가 묻어 있는 듯하여 더욱 숙연해 지는 것이다. 일제의 폭압 속에서 벗어난 기쁨도 잠시, 새로운 열강들의 한반도 분할로 민족상잔의 비극 6.25한국전쟁까지 이어진 것은 두고두고 천추의 한이 될 부분이지만, 우리민족의 자주권과 인권회복을 위해 개인의 일생을 거침없이 내버렸던 광복군들의 희생정신과 투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반드시 되물림 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비록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시대를 살아오고 있는 현실이지만,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 의식과 저력을 생각한다면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머지않아 도래할 것이라 낙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