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논의 대타협

2007-05-20     글/김정숙 기자
개헌안 철회, 노 대통령-한나라당 윈윈게임
18대 국회에서 4년 연임제 논의하기로 합의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4월 14일 4년 연임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발의하겠다던 뜻을 거둬들였다. 한나라당이 의원총회에서 “18대 국회와 차기 정부에서 개헌을 완료토록 노력하고 이를 대선공약으로 제시한다”는 개헌 당론을 추인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이로써 연초 노 대통령의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 제안으로 시작된 개헌논란은 일단락됐다.

노 대통령은 “각 당이 18대 국회 개헌을 당론으로 정해준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한나라당의 당론 속에 4년 연임제라는 표현이 들어갔고, 이 정도는 책임있는 대국민 약속으로 볼 수 있다”고 부연했다.
청와대가 한나라당에 제시했던 개헌발의 유보의 조건이 형식과 내용 면에서 모두 충족됐다는 얘기다. 노 대통령은 특히 한나라당이 차기 국회에서의 4년 연임제 논의를 개헌공약에 포함시킨 데 만족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한나라당은 권력구조 개편문제에 대해 “4년 연임제를 비롯해 모든 내용을 논의한다”며 원포인트 개헌으로 제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문구 자체가 앞으로 대선과 개헌추진 과정에서 구속력을 갖게 될 것이란 게 청와대의 자체적인 판단인 것이다. 이로 인해 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임기 내 개헌을 공약으로 제시한 데 대한 정치적 부담을 덜게 됐다는 것이다.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 입장에선 약속어음 형태로나마 대선공약을 이행한 것이며, 한나라당은 그 어음에 배서를 한 것”이라며 “앞으로 각 정당의 경선 출마자나 대선후보들이 개헌문제를 주효한 선거공약으로 내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 입장에선 한나라당에 제시한 요구조건을 사실상 관철함으로써 개헌안 철회의 명분을 얻었고, 한나라당 역시 ‘개헌정국’의 파고를 피해 가게 된 윈윈 게임으로 볼 수 있다.


철회 합의, 긴박했던 순간들
한편, 노 대통령이 개헌안 발의계획을 철회하기까지 청와대와 정치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신경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등 나머지 정당에 차기국회 개헌을 덜컥 합의해줬다가 노 대통령이 “당론으로 정하고 확실한 대국민합의를 하라”고 고강도 주문을 하고 나서자, 개헌발의 강행이 범여권 통합에 미칠 부정적 영향 등을 우려하며 가장 애를 태웠다는 후문이다.
지난 4월 11일 아침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등 5당과 통합신당모임 등 6자 원내대표는 18대 국회 초반 개헌안 처리에 전격 합의하고, 청와대에 개헌안 발의 유보를 공개 요청했다. 이 소식을 접한 청와대는 문재인 비서실장 주재 회의의 주제를 바꿔 긴급하게 대책을 숙의했다.
청와대는 긴급회의 끝에 각 당이 차기정부, 18대 국회에서의 개헌을 당론으로 정하고 정당 간 합의를 통한 책임 있는 대국민약속을 해주면 발의를 철회할 수 있다며 조건부 유보론을 발표했으나, 한나라당은 “무조건 개헌안을 철회하라”고 강한 톤의 논평을 내놨다.
이에 발끈한 청와대가 4월 12일 당론 확인 절차가 없으면 예정대로 4월 18일 개헌안 발의를 강행할 수 있다는 강경한 입장을 발표하면서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됐다.
이후 다음 날인 13일 오후 한나라당이 의원총회를 열어 박수로 18대 국회에서의 개헌안 처리 당론을 재확인했고, 청와대가 14일 개헌발의 철회를 발표하면서 3개월 남짓 계속된 개헌 정국은 일단락되게 이른다.
청와대가 개헌발의 강행을 시사한 12일부터 14일 개헌발의를 철회할 때까지 우리당은 장영달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중재노력을 기울였다는 후문이다.
특히 청와대와 충분한 사전조율 없이 6자 원내대표 회담에서 개헌안 발의 유보 요청을 전격 합의한 장 원내대표가 가장 애를 태운 것으로 전해졌다.
장 원내대표는 지난 12일 낮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문재인 비서실장을 만나 “개헌 발의는 대통령으로서 지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사항이다. 연설문 원고도 다 준비돼있고 한나라당이 끝내 방해한다면 비상한 수단을 동원할 생각까지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장 원내대표에 따르면 비상한 수단에는 본회의장 개헌 연설이 무산될 경우 대통령이 국회 본청 앞 돌계단에서 연설을 강행하는 것도 포함됐다고 한다.
문 실장과의 회동 직후 장 원내대표는 한나라당 김형오 원내대표를 찾아가 청와대의 의지를 전하며 “열린우리당으로서는 더 이상 할 일이 별로 없다. 만약 6자 합의가 무산되면 모두 한나라당 책임”이라며 개헌안 당론 확인을 강하게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설득 과정에서 장 원내대표는 “우리는 솔직히 내년에 총선도 있고 한데 탄핵 비슷한 것이라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 개헌안을 진짜 발의하면 그렇게 안 되리라는 보장이 있느냐”며 과장 섞인 엄포도 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김 원내대표는 다음날인 13일 오전 장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오후 의총에서 정중하게 당론을 확인하겠다”고 밝혔고, 실제 의총에서의 당론 확인 절차가 있은 뒤 긴장은 급격히 해소됐다. 이 과정에서 한명숙 전 총리도 13일 청와대가 개헌안 발의를 철회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개헌 발의를 철회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 14일 문 실장은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에게 발표 직전 전화를 걸어 당론 확인 절차를 밟아준 데 대해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고, 우리당 장 원내대표에게도 전화를 걸어 “수고를 많이 하신 것 같다”며 인사를 건넸다.
우리당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선 것은 청와대가 만의 하나 개헌안 발의를 강행할 경우 대통합 신당 작업이 물 건너 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가장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우상호 의원은 “개헌안이 발의되면 통합신당모임, 민주당 등이 전부 현 시점에서의 개헌에 반대하기 때문에 대통합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는 점이 가장 큰 부담이었다”고 털어놨다.
장 원내대표도 “이제 개헌 문제를 한 고비 넘겨 대통합신당 문제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며 “이번에 우리당이 개헌 문제를 푸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대통합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 지 다른 (범여권) 정파들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헌 ‘합의’에 큰 의미
이번 합의의 의의는 노 대통령이 헌정사상 최초로 각 정파와 개헌을 담보하는 정치적 틀을 만들어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개헌안 철회에 대한 정치적 타격을 상쇄하는 한편 대선정국에서 각 당과 후보들에 대한 지렛대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노 대통령의 이번 결정을 개헌철회가 아닌 ‘18대 국회 개헌추진 합의 수용’이라고 하는 데서 이런 기대감이 느껴진다.
한 핵심참모는 “우리나라 개헌 역사에서 처음으로 각 정파와 대통령이 개헌에 합의했다는 데 정치사적 의미가 있다”며 “정치발전에 한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정치적 판단 외에도 한나라당이 당론 추인 과정에서 보여준 유연성이 노 대통령의 결단을 앞당긴 배경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나라당의 의총결과가 나왔을 때만 해도 청와대 참모들조차 “16일까지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셈이다.
한 핵심 참모는 “당론 추인으로 한나라당이 할 수 있는 성의표시는 다 한 것으로 본다”며 “한 단계 발전한 정치적 태도”라고 평가했다.



노 대통령 개헌 철회 뒷 배경은?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이 현실정치적 차원에서 열린우리당이 개헌안 발의를 내켜하지 않는 상황이 최종 판단에 작용했을 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당은 전날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6자 원내대표 합의를 추인하는 한편 물밑에선 정치적 파국을 막기 위해 한나라당과 청와대 사이를 오가며 막후 중재 노력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이 개헌 당론을 재확인하자, 우리당은 이를 환영하며 청와대와 다른 스탠스를 취했고, 우리당의 이런 움직임이 ‘개헌발의는 안된다’는 무언의 압력으로 청와대에 전달되면서 “18대 국회 개헌을 국민에게 약속한 각 당의 합의를 수용한다”는 대통령의 메시지로 나온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등 임기 말 경제와 민생문제에 전념해달라는 여론이 정치권의 반대 등 현실의 벽에 부닥친 개헌 의지를 접도록 한 요인이 됐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청와대측은 “개헌문제는 한·미 FTA와 전혀 관련이 없다”며 이른바 ‘맞바꾸기’ 의혹을 일축했으나, 노 대통령으로서는 한·미 FTA 말고도 부동산, 교육, 로스쿨 등 국회의 도움 없이는 처리할 수 없는 국정과제가 산적해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즉 개헌문제에 매달려 정치적 논란을 지속하는 것보다는 국민적 지지와 정책 추진력을 끌어낼 수 있는 미래과제 해결에 집중하는 것이 임기 말 효율적인 국정운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데 판단이 모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개헌문제의 경우 대통령 본인으로선 대선공약을 이행하는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전제한 뒤 “이제 FTA 보완대책을 비롯해 교육 3불정책과 부동산문제 등 민생현안을 마무리하는데 역점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번 결정은 노 대통령의 흔쾌한 결정이라기보다는 고심 끝에 내려진 결정이라는 게 정치권의 뒷이야기다. 노 대통령은 지난 4월 13일 한나라당이 의총을 통해 ‘18대 국회 개헌’을 당론으로 재확인한 시점부터 다음날인 14일 오전 개헌발의 철회를 홍보수석을 통해 발표하기까지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4월 15일 한 언론과의 전화통화에서 “대통령의 개헌발의 유보 결정은 흔쾌하게 이뤄진 것이라기보다는 고심 끝에 내려진 결정이라고 보여진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막판까지도 이번 국회에서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을 정치권이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다는 것이다.
이번 국회에서 ‘원포인트 개헌’을 정치권 합의로 이뤄낼 경우, 차기 대통령, 차기 정부는 5년 단임제와 잦은 선거 등으로 인한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8년 임기를 내다보면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개헌은 현 정부가 다음 정부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게 노 대통령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특히 원내 1당인 한나라당이 현 정부 임기 내 개헌을 수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의견이다. 여기에다 노 대통령은 정치권의 합의대로 18대 국회 초반부터 개헌 논의를 하게 되면, 소모적인 정쟁의 수반도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도 했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 같은 점 때문에 노 대통령은 막판까지도 ‘개헌발의 유보’ 쪽보다는 가능하다면 현 정부 내 개헌을 추진하는 쪽에 마음이 기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이 때문에 13일 밤부터 14일 오전까지 고심을 거듭하면서 참모들의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정치권 상황이나 움직임에 대해 재차 확인을 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결국 현 정부 내 개헌이 바람직하다는 소신은 변함이 없었지만 “6개 정당과 정파들이 개헌추진을 합의하며, 대통령에게 요청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도 정치의 진전 아니겠느냐”는 심경 속에서 정치권의 요청을 수용하는 쪽으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권 ‘개헌 철회 합의’에 환영일색
이번 개헌논의 철회 합의 결정에 정치권자 일제히 환영의사를 표시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분위기다.
노 대통령 임기기간동안 개헌에 반대해온 한나라당은 대선정국의 중대 불안요인이 제거됐다며 개운한 분위기가 역력했고, 개헌찬성과 유보를 오가며 곤혹스러워 했던 열린우리당은 시름을 크게 덜었다는 분위기다.
전날 18대 국회에서 개헌문제를 처리한다는 당론을 재확인한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개헌철회 방침을 적극 환영하면서 민생경제 회생과 공정한 대선 관리에 힘써줄 것을 주문했다.
유기준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늦었지만 당연한 귀결”이라며 “이제부터 정치적 문제에서 손을 떼고 오직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후속 대책과 북핵폐기 이행 등 산적한 현안 해결, 민생경제 회복, 공정한 대선관리에만 올인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강재섭 대표도 전남 무안·신안 재보선 지원유세중 개헌철회 소식을 듣고 “사필귀정이다. 민심과 거리가 있는 일을 추진하면 어떻게 되는지 대통령이 알게 된 것 같다”며 “이제부터는 민생이다. 대통령은 민생을 잘 챙기고 선거 공정관리에 전념해달라”고 말했다고 나경원 대변인이 전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사이에서 중재노력을 기울였던 열린우리당도 환영 입장을 밝히며 노 대통령이 국정현안 처리에 전념해줄 것을 강조했다. 최재성 대변인은 구두논평을 내고 “정치권이 결단했고 대통령이 결단해서 의미있는 합의를 했다”며 “앞으로 한미 FTA와 남북문제 등 국정현안에 총력을 다해 지혜롭게 처리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기우 공보담당 원내부대표는 “임기내 개헌논란이 없어진 만큼 정국안정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통합신당모임의 양형일 대변인은 논평에서 “매우 적절한 결론”이라며 “정치권은 약속대로 개헌문제가 18대 국회에서 주요 이슈로 다뤄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고, 대선주자들도 선거과정에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김재두 부대변인은 구두논평에서 “뒤늦게 국회와 국민의 뜻을 받들어 개헌발의를 안한 것은 다행”이라며 “앞으로도 임기 말까지 정치문제에 초연하고 민생경제와 안보에 전념하길 바란다”고 주문하고 “모든 정파는 다음 정권에서 국민의 뜻을 받들어 개헌에 착수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