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팬클럽 화제

2007-03-22     글/김정숙 기자
집착도 지나치면 독…정치인 팬클럽 과열
박사모 회원 5만명 최대 규모, 자발적 지지이나 통제 불가능해

21세기 한국정치의 대표적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정치인 팬클럽’ 문화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최근 정치인 팬클럽들이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의 차원을 넘어 부적절한 언행, 경쟁 정치인에 대한 감정적인 비난 등으로 물의를 빚는 일이 잦다. 특히 최근에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팬클럽이 같은 당내 유력 대선후보 이명박 전 서울시장 폭로전의 포문을 열어 논란이 되고 있다. 정치인 팬클럽의 원조는 2000년6월 결성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정치의 들러리가 아니라 주역으로 정치사를 새로 쓰기도 했지만 사랑도, 집착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사례가 대선이 다가올수록 부쩍 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들에겐 이름값만큼의 큰 규모의 팬클럽이 함께한다. 주자들의 기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팬클럽들의 활동도 함께 달아오르고 있다.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팬클럽 성향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여당 주자인 정동영·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팬클럽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탈퇴한 회원 비율이 각각 10% 정도 된다. ‘김근태 친구들’(김친)엔 30~40대 남성들이 많고, 사회적 논쟁꺼리를 놓고 적극적인 토론이 활발히 이뤄진다.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정통들) 역시 30~40대 중심이지만 여성이 절반가량 활동하는 것으로 운영진은 보고 있다. 자발적 정치공동체를 표방하는 만큼, 생활 속에서 겪는 부당함의 해결책을 찾는 생활정치 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박사모, 엠비 등 후보 따라 규모 커져
대선후보 팬클럽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단체는 단연 박사모다. 2004년3월30일, 광고감독 출신인 정광용(49)씨가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다. 그해 4월 총선 때 정씨 집 텔레비전을 천막당사에 가져가 응원하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회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 지금은 5만여명에 이른다. 홈페이지에 글을 쓰거나 월 회비 3천원을 내는 책임회원은 1,200여명이다. 온·오프라인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은 30~50대 주부나 자영업자가 많다. 전국 16개 지부를 비롯해 미국 뉴욕, 중국 베이징 등 해외에도 7곳의 지부를 두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참석하는 행사엔 빠짐없이 동참하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박사모를 둘러싼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정치세력화. 2005년5월 충북에서 가진 창립 1주기 워크숍에선 ‘10만 회원·5만 책임당원 가입’이란 목표를 제시해 전조를 드러냈다. 책임당원을 늘려 한나라당 내 의사결정 과정과 대권후보 선정에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의도다. 이전 노사모의 열린우리당 내 영향력 행사 양태와 일맥상통한다. 당시 남경필·원희룡 등 당내 소장파 의원은 “맹목적 사모곡을 불러선 안 된다”며 경고성 멘트를 날리기도 했다.
실제로 박사모는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창립 7개월여 만에 3만 회원을 돌파한 박사모는 끊임없이 10만 회원 달성을 부르짖고 있다. 이는 2002년 대선에서 노사모가 5만여 회원으로 영향력을 발휘한 뒤 한때 12만 명 선까지 확대된 걸 염두에 둔 포석이다.
박사모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정치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이외에도 다양하다. 이전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이 박 전 대표와 불화를 빚자 네티즌들은 이재오 의원 홈페이지를 공략해 마비시켰다.
최근 무섭게 기세를 올리는 곳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팬클럽인 ‘엠비 팬클럽 연대’(엠비연대)다. 지난해 10월, 제각각 활동하던 ‘나라사랑 이명박’, 변호사 지지그룹 ‘송법회’ 등 6곳이 모여 결성했다. 지금은 팬클럽 20여곳과 회원 4만여명이 가입해 있다. 20~40대 직장인과 전문직 종사자가 비교적 많다. 이 전 시장의 생일이자 대선을 치르는 12월19일을 기념해, 매달 19일을 ‘엠비데이’로 정하거나 그의 공약을 공부하며 매니페스토 운동(참공약 선택하기)을 벌이는 등 다양한 지지운동을 펴고 있다.
봉사활동은 팬클럽에서 빼놓을 수 없는 행사다. 특히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민심대장정 때 자원봉사자로 만난 이들의 모임인 ‘아름다운 손’은 애초부터 봉사단체로 꾸려졌다. 매달 충북 음성 꽃동네를 방문해 목욕·빨래 등을 돕는다. 30~50대가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데, 한나라당 지지자가 많지 않아 “손 전 지사가 탈당했으면 좋겠다”는 기류가 적지 않다.
조직적인 ‘사이버 전사’를 꾸리는 일도 팬클럽의 공통 과제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김근태 친구들’(김친)이다. 김친은 인터넷에서 필명을 날리는 논객들을 홈페이지로 끌어들여 활발한 토론을 벌일 계획이다. 또 여기서 나온 이야기를 곳곳으로 전파할 ‘김근태 다물군’도 조직중이다. 오용석 대표는 “김친 홈페이지를 민주 개혁세력을 복원할 서슬퍼런 시대의 담론 기지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은 회원 100명을 ‘카레이서 군단’으로 조직해, UCC를 만들어 배포할 계획이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팬클럽인 ‘찬들넷’ 등도 인터넷 여론을 달굴 동영상 제작단을 구상하고 있다.
대선 주자들에게 팬클럽은 가장 든든한 자신감의 원천이다. 하지만 ‘명박사랑’과 ‘박사모’ 사이에 최근 벌어진 검증 논쟁처럼 팬클럽들끼리 경쟁이 과열되면 주자들의 이미지도 타격을 받는다. 한 주자의 팬클럽끼리도 경쟁이 벌어져 주도권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상황이 좋든 나쁘든 각 진영은 팬클럽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박 전 대표 진영의 이정현 공보특보는 “팬클럽 회원들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도 없고 통제도 안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원들은 특정한 목적을 가진 ‘정치 낭인’이 아닌, 순수한 지지자다. 캠프에서 관리를 하기 시작하면 사조직이 되기 때문에 순수함을 믿고 자동 조절되길 바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치 팬클럽의 부작용
지난해 노혜경 노사모(노무현 대통령 팬클럽) 대표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피습사건 직후 ‘성형수술’ 운운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가 사회적·정치적 파문을 일으켰다.
비난이 쏟아지자 관련 글을 삭제하긴 했지만 노사모 홈페이지에선 한동안 논란이 계속되었다. 일부 회원은 외부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 박 대표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기도 하다.
박사모의 일부 회원도 박 대표에게 위해를 가한 지충호 씨를 이송 중이던 경찰차량을 막고 물병을 던지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해 도마에 올랐다. 박사모는 이 같은 행동에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자 홈페이지에 ‘과잉 행동을 자제하고 역풍의 빌미를 주지 말자’는 등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박사모는 종전에도 이른바 반박(反朴)으로 분류되는 한나라당내 소장파 의원들을 거세게 비판하는 등 지나친 대응으로 눈총을 받은 바 있다.
박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 간의 차기 대권을 둘러싼 신경전을 그대로 옮겨놓은 박사모와 ‘명박사랑’의 대립, 이회창 전 한나라당총재 지지그룹인 ‘창사랑’의 집요한 이전총재 정계복귀 요구 등도 정치 팬클럽의 현 주소를 말해주는 사례다.
팬클럽의 대부분의 회원들은 지지 행사에 참여하고 후보의 장점을 전파하는 등 단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는 다른 주자를 음해·비방하고 조직적으로 헛소문을 퍼뜨리는 등 후보 캠프에서조차 “이러다 선거법 위반으로 걸릴까 걱정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열돼 있다.
특히 선두 다툼을 벌이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 측의 일부 팬클럽 회원은 상대편을 ‘경박이’, ‘유신 공주’ 등으로 비하하면서 일부러 상대를 자극하기도 한다. 이 전 시장 측과 박 전 대표 측은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모임이 아니기 때문에 제어하기도 어렵다”며 “’정치 예비군’들이 개인의 정치적 발판으로 삼기 위해 만든 단체도 있다”고 말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점 단속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팬클럽”이라며 “온라인 팬클럽의 경우 인터넷에서 ‘누가 됐으면 좋겠다’ 하는 정도의 의견 개진은 괜찮지만, ‘누구를 찍어야 한다’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선거법 위반”이라고 했다.
정치인 팬클럽이 국민의 자발적인 정치참여를 높이고 대중정치 시대를 열게 한 순기능이 있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잇따르고 있는 일부 정치인 팬클럽들의 부적절한 사례들은 ‘빛’에 가려져 있던 ‘그림자’도 함께 생각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한 정치권 인사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과도한 풍토 속에서 팬클럽의 방식으로 적극적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좋지만, 충동적인 감정으로 상대를 맹목적으로 흠집내는 등의 일탈행위는 비판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올해는 정치권의 가장 큰 이슈인 대선이 열리는 해인만큼 좀 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한 정치학자는 “정치인 팬클럽들이 대체적으로 해당 정치인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면서 연예인을 좋아하듯 하는 것은 문제”라며 “제도 속에서 정치인의 역할을 바라보고 그 역할을 지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고 설명했다



대선주자 사조직 단속 한다
중앙선관위가 12월19일 대선과 여야의 후보 경선을 앞두고 대선주자 지지모임이 급격히 늘어나 선거운동에 동원되는 사조직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이에 대한 경고와 함께 강력한 단속에 나서기로 했다.
선관위는 특히 3월부터 본격화할 정당의 후보경선 레이스에 이들 모임의 적극 개입이 예상된다며 적발될 경우 폐쇄명령과 고발 등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현행 선거법상 어떤 모임이 특정 후보를 대외적으로 지지하거나 다른 후보를 불리하게 하는 활동을 하면 사조직으로 간주돼 처벌 받게 된다.
중앙선관위 고위관계자는 “대선주자 지지모임이 경쟁적으로 늘어나면서 사전선거운동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오프라인 모임의 경우 불법ㆍ탈법 가능성이 더 큰 만큼 이른 시일 내 사례별 기준을 공표하고, 이에 따라 강도 높은 단속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선관위는 지난 연말부터 특정 정당 대선주자 초청행사를 개최했거나, 향후 대선 주자들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를 기획중인 10여개 단체를 집중 감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는 지난해 지방선거 출마자나 공천 탈락자가 대거 참여해 자발적인 모임으로 보기 어려운 곳도 상당 수 포함돼 있다고 선관위측은 전했다.
실제로 최근 정치권 주변에는 포럼이나 학술단체, 시민단체 등 이름을 내건 대선주자 지지 모임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한나라당의 이명박 전 서울시장측은 ‘안국포럼’을 모델 삼아 현재까지 12개 광역시도에 포럼을 결성했다. 박근혜 전 대표측도 1월11일 ‘대한민국 발전을 위한 한국인 포럼’에 이어 조만간 ‘호남 포럼’과 ‘강원인 정책포럼’을 발족시킬 예정이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측은 지난해 11월 싱크탱크인 ‘동아시아 미래재단’을 만들었고, 대구와 강원 등 지역별 포럼을 설치하기로 했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측은 16개 광역시도별로 결성된 한반도포럼의 외연을 확대하고 있고, 정동영 전 의장측도 ‘평화와 경제 포럼’의 지역 조직 신설에 나섰다.
이와 함께 자생적인 인터넷 팬클럽, 산악회를 비롯한 오프라인 동호회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를 지지하는 인터넷 팬클럽만 각각 20여개이고 양측의 회원을 합치면 35만명이 넘는다는 추산이 나올 정도다.
선관위 관계자는 “인터넷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팬클럽은 자발적 정치 참여라는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과열 경쟁양상을 띄면서 불법 선거조직으로 전락할 소지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