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동북공정 5년
2007-03-20 글/신혜영 기자
중국, 동아시아는 기원 자체를 바꾼다…동북공정 뒤에 숨겨진 엄청난 음모
한반도 고대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논란을 빚어온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지난 1월31일로 마감됐다. 지난 2002년2월부터 5개년 계획으로 진행된 동북공정의 연구과제 107개 중 절반 이상인 56개가 한국과 관련된 것으로 드러났으며 그 중 고구려와 발해 관련 과제가 70%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끝난 동북공정. 그러나 이는 또 다른 ‘공정’을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역사왜곡으로만 알고 있었던 동북공정 뒤에는 엄청난 중국의 음모가 있었다. 과연 동북공정 뒤에 감춰진 중국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동북공정이란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로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과제(공정)’를 뜻한다. 즉,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프로젝트다.
중국은 지난 2001년6월 동북공정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기로 하고 8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02년2월18일 중국정부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동북공정을 추진했다. 연구는 중국 최고의 학술기관인 사회과학원과 지린성[吉林省]·랴오닝성[遼寧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 등 둥베이삼성[東北三省]의 성 위원회가 연합해 추진, 연구기간은 5년으로 총 24억원을 들여 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연구는 크게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로 나누어 진행됐는데 주요 연구과제는 ▲동북지방사 연구 ▲동북민족사 연구 ▲고조선사·고구려사·발해사 연구 ▲중국과 한반도 관계사 연구 ▲한반도 정세 및 변화와 그에 따른 중국 동북 변경지역의 안정에 관한 영향 연구 등이다. 특히 고조선·고구려·발해 등은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 속한 지방정권인데, 북한과 한국의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왜곡하고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전제 아래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과제 절반이상이 한국과 관련
지난 5년 동안 진행 된 동북공정의 실체는 실로 대단했다.
1월25일 동북아역사재단 이인철 책임연구위원이 해양전략연구소의 스트레티지21에 기고한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국의 대응’ 논문을 살펴보면 동북공정의 연구과제 107개 중 절반 이상인 56개가 한국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역대 한.중 관계를 제외한 51개 연구과제 중 고구려와 관련된 게 48%, 발해가 26%로 70%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동북공정을 주도한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의 리성 주임이 지난해 9월 한국의 비판 여론을 의식해 “동북공정 중 한국관련 주제는 10%도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보다 다섯 배나 많은 수치다. 이 연구원은 지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공개 또는 비공개된 동북공정 연구과제 114개(공문포함)를 분석, 2002년 50개, 2003년 45개, 2004영 7개, 2005년 12개 등 모두 114개의 연구과제와 관련된 정보를 입수해 공문서류를 제외한 107개를 주제 인물 소속별로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주제별로는 한국고대사가 33개, 한.중 관계가 18개, 한반도 문제가 5개, 동북지방사 27개, 중.러 관계가 18개, 기타 6개로 분석됐다.
장수왕을 중국사람으로 탈바꿈
연구과제 절반이상이 한국과 관련되어 있던 동북공정은 우리 역사를 어떻게 왜곡했을까.
연개소문이 군사를 지휘하던 ‘성산산성’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벼렸다. 특히 어금니처럼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성이라는 ‘아성’은 고구려 산성 130여개 중 단 두세 개만 남아있는 상태며 이곳 역시 이상하게 변해버려 현재 성산산성에서 아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대신 중국식 사찰이 흉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 천혜의 요충지였던 ‘박작성’은 압록강변에 쌓았던 산성으로 험준한 산을 의지해 요새를 구축했고 앞에는 압록강이 가로막고 있어 견고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전할 만큼 이름난 성이다. 그러나 중국은 명나라 때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우기면서 산성을 허물고 호산장성을 지었다.
‘장수왕릉’도 중국의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1500년 이상을 버텨낸 동양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장수왕릉이 2년 전 중국의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세계에서 이 유산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다.
또한 중국 정부는 발해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발해진 인근 수천여기의 회족 무덤들을 모두 옮기도록 지시하며 상경 용천부와 흥룡사 인근 가옥들 대부분을 철수 시켰다. 특히 유적 곳곳에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 국가라고 명시해 이곳을 명실상부 중국 문화재로 인식시키기 위해 무단히 노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중국은 지금까지 최소한 2차례에 걸쳐 백두산(중국명 창바이산/長白山) 천지를 소재로 한 기념우표를 발행한 것으로 확인됐고 고구려의 유적인 장군총을 통화의 풍경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1500년의 세월을 견뎌낸 우리의 성곽이 중국에 의해 하루아침에 중국의 성으로 바뀌었으며 우리의 유물이 고스란히 중국의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한편, 중국은 전통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이라고 해 치우를 자신들과 상관없는 오랑캐의 집단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한.중수교를 즈음해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의 상징이었던 치우상은 남북한에서 우리 민족의 바탕이라고 강조하는 동이족 수장의 형상을 중국은 치우까지도 그들의 신화적 조상으로 끌어안아 우리와의 문제의 씨앗을 제거하려고 했다. 1997년에 완공된 귀근원(뿌리로 돌아가는 정원)과 중화삼조당(중화 민족의 3명의 조상을 모신 사당)은 그러한 중국의 치밀한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식민지로 변모한 평양
해외 유명 사이트에 평양을 영문으로 ‘기원전 108년부터 평양은 중국의 식민지였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다른 사이트들에서도 평양은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미 세계 사이트에서는 평양이 중국 땅이었던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외국 사이트에서 ‘Koguryo Kingdom’을 검색하면 절반이 중국사이트로 연결되며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지방정권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2001년 북한은 한국정부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단독 등재 신청을 했고 이를 안 중국정부는 북한 측에 공동 등재를 제안했으나 북한 측이 거부했다. 그 후 중국 정부는 유네스코에 고구려 세계유산을 Korea로 등록하는 것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시 전문가가 인접 국가를 현장 실사를 하는데 분쟁의 소지가 있는 국가의 전문가는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당시 중국의 ‘려수’라는 전문가가 실내조사를 했고 부정적인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해 결국 북한 단독 등재는 무산됐다. 결국 2004년 중국과 북한 공동 신청을 했지만 고구려 유산을 China라고 해서 중국 내 고구려 유적은 모두 중국의 유물로 등재됐다. 원래 북한이 단독 신청했을 때 조사 전문가는 중국인이 아니었는데 실사 6개월 전 세계문화유산위원회의 징펭이라는 중국인 직원에 의해 중국 교수로 교체됐고 당시 유네스코 측에서는 비정상적인 일이라 한국 측의 의향을 묻는 공문을 보냈으나 우리 측의 무관심으로 결국 중국인 교수에 의해 조사가 진행되고 말았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안일한 태도에 대해 홍콩의 아시아 타임즈는 ‘중국은 고구려사가 중국역사라는 사실을 세계적으로 공인받기 위해 21개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이사국을 대상으로 학술적 홍보를 펼치고 있는 반면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고구려사에 관심이 없으며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한바 있다.
동북공정 2차 작업 본격화
중국 박물관에는 고구려 설명을 ‘고구려는 국가가 아닌 일개 정권’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미 중국은 왜곡의 단계를 지나 자국민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주입시키는 단계에 있다.
지금까지 고구려를 까오구리(GaoGouli)란 중국식 발음으로 불러왔던 중국은 2004년 고구려 유물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고구려의 영문이름을 한국 발음인 ‘Koguryo’로 바꿨다. 이는 세계 다른 나라들에게 이미 익숙한 한국의 고구려를 이용한 중국정부의 치밀한 계획에서 비롯됐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써 오던 ‘Koguryo’ 영문을 버리고 2000년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개정안에 따라 모든 고구려의 영어 표기를 ‘Gogureo’로 바꿔버렸다. 외국인들에게는 ‘K’로 시작하는 고구려와 ‘G’로 시작하는 고구려는 분명 다른 나라일 것이다.
중국 길림성 남부에 위치한 지안시는 인구 약 23만명, 3세기 초부터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고구려 시대의 고분과 유적들이 많다. 지안시의 고구려 유적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되어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중국 내 조선족들에게 알리기 위한 민족말살교육으로 3관교육을 시키는 데 첫째, 민족관-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다. 둘째, 국가관-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다. 셋째, 역사관-고조선.고구려 등 과거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다.
현재 길림, 요녕, 흑룡강성 등 동북 3성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약 2백만 명으로 우리말과 글을 쓰는 한 민족임이 확실하지만 동북공정의 완성 뒤에 시작된 철저한 사상교육을 강요받으며 민족의 뿌리를 강탈당하고 있다. 우리의 무관심속에 중국은 우리와 피를 나눈 조선족을 중국민족으로 통합하고 왜곡된 고구려 역사를 그들의 입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일반화하려는 동북공정 2차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침탈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외교부는 중국정부가 한국사 관련 역사 해석을 학생들에게 교육하거나 교과서에 반영하는 경우 동북공정의 연구 성과를 공식화한 것으로 간주하겠다면 교과서 개정 문제를 일종의 마지노선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중국 중.고교 역사교과서에서는 이미 1948년 이전의 한국 역사가 모두 사라져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중국의 역사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2004년3월 고구려사연구재단을 발족했다.
치밀한 계획 속에 진행된 동북공정
이러한 중국의 동북공정은 하루아침에 나온 정책이 아니다.
서경대 서길수 교수는 동북공정은 중국이 1981년 이후 ‘다민족통일국가론’을 기반으로 추진하고 있는 역사 만들기의 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중국은 세계 중심 국가건설이라는 야욕으로 1980년 실크로드의 위구르족과 1986년 독립국가 티베트를 서북공정과 서남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버렸다. 동북공정은 이미 주변의 제국가에 대해 공정을 마치고 끝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눈을 돌린 동제3기 프로젝트다.
이와 관련, 지난해 12월31일 KBS 뉴스에서는 1982년 동북공정이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문건이 발견 됐다며 이러한 사실을 보도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중국 지린성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동북사지 2004년4월호에 중국사회과학원의 한 연구원이 ‘이론체계를 세우고, 연구수준을 높이자’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 여기 소개된 한 편지글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편지는 1982년, 당시 중공 중앙정치국위원이자 중국사회과학원 원장인 호교목이 역사학자 ‘리도’에게 보낸 것우로써 ‘반동적인 이론’으로 지목된 7개 이론 가운데 2개가 한국과 관련된 것이다.
“고구려는 동북을 점유했고, 백제가 중국 강남을 400여년 통치했다” “당나라 때 발해국은 고구려 사람이 건립한 국가, 고조선의 영토는 중국 산서 지역 상간하까지라고 한다”
이 편지는 고구려, 백제, 발해, 고조선 등 한국 고대 국가를 다룬 역사가 모두 잘못됐으니 이를 반박하는 이론을 만들라고 주문한 것이었다. 리도는 이 편지를 받고, 자신이 주필을 맡고 있던 잡지 역사연구를 통해 지시를 실행에 옮겼다. 공산당 고위간부가 쓴 이 편지는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중국 학계와 정치권이 긴밀히 연계해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동북공정 이론의 원조(元祖)라 불리는 ‘쑨진지’ 선양 동아연구중심 연구원의 대표저서 ‘동북민족원류’가 1986년 출간됐을 뿐 아니라 이미 다른 지나 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쑨진지는 책 서문에서 “1950년대부터 이 작업을 준비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반도 통일에 대비한 中국가전략
그러나 동북공정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건 역사왜곡이 아닌 바로 국경문제다. 중국이 한국 역사를 침탈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역사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영토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의 주장에 따르면 동북공정의 목적은 “동북 변경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고,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고, “국제적 도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도록 수준 높은 연구 성과를 쟁취하는 데” 있다. 순수한 학술적 차원이 아니라 변경 지역의 안정을 위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어, 목적이 압록강 북녘의 영토와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김정일 정권이 붕괴되고 남북한의 통일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건설되면 한반도의 4분의 1크기에 200만 인구를 가진 옌볜 조선족자치주가 동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변강사지연구중심의 비공식 위탁과제 중에는 쉬원지(徐文吉) 지린대 교수의 ‘조선반도 남북통일 진전 및 그것의 중국에 대한 영향 연구’가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제는 동북공정이 한반도 통일 상황에 대비한 중국 국가전략 차원의 연구라는 국내 학계의 분석을 뒷받침해 준다.
이와 관련, 지난 2004년10월 Asia Tomorrow는 ‘중국 공산당이 과거 오랫동안 대만을 독립된 지역으로 취급했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이 국제적으로 아무런 도전이나 해명 요구를 받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향후 북한지역의 독립성에 좋지 못한 징조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국경과 영토 때문에 이와 관련된 역사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졌던 것.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뿐만 아니라 고조선에서 간도문제까지 한국사 전반에 대한 문제를 다뤘다. 때문에 중국의 신화시대를 역사시대로 편입하려는 중국정부 차원의 단대공정(斷代工程/1996~2000년)과 중국문명의 기원을 추적하는 탐원공정(探源工程/2003~진행중)과 연결돼 있다. 문제는 여기서 나온 결과물들이 고스란히 동북공정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동북지역에 일어날 국제적 도발을 두려워하고, 동북지역의 안정을 위해 천문학적 연구비를 들여 한국 역사를 침탈하려 할까.
이에 서경대 서길수 교수는 “중국이 현재 압록강 북녘 옛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역사적 정통성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옛 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는 물론 그 뒤 이어지는 요, 금, 원, 청 같은 모든 나라의 주체가 한(漢)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었다. 한때 명나라가 요동반도 일부를 차지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한번도 완전한 한족정권을 세우지 못했다. 긴 역사적 정통성을 정당화하지 못하면 앞으로 동북지방의 안정을 유지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서 시작된 작업이 동북공정이다”라고 설명했다.
본격적인 역사침탈 ‘동북사지’ 주목
지난 1월29일 고구려연구회 주최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중국의 동북공정 5년, 그 성과와 한국의 대응’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에서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중국의 역사침탈 작업은 이미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2004년 지린성사회과학원으로 연구주체를 옮겨 더욱 강화됐다”며 “동북공정은 중국의 새로운 역사 만들기인 ‘다민족통일국가론’의 한 프로젝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서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변강사지연구중심은 2002~2004년 47개의 동북공정 기초연구 과제를 수행했으나 한국의 반발이 거세지자 2005년에는 공식적인 과제모집을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변강사지연구중심을 대신해 중국 동북지역사 연구를 떠맡은 지린성사회과학원은 2004년 학술지 ‘동북사지’를 창간하고 3년 동안 301편의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한국에서 동북공정이라는 껍데기를 가지고 난리를 치는 동안 중국은 한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 강도 높은 연구를 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동북공정의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전문가위원회 위원 장푸유가 동북사지의 사장으로 취임한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동북사지에 실린 논문 301편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106편이 고구려 관계 논문이었으며 발해 관련 논문이 17편, 고조선 관련 논문은 9편이었다. 또 백두산을 주제로 한 논문도 21편에 이르렀으며 중국 청(淸)대를 다룬 56편의 논문 가운데 상당수가 간도문제 및 조선.청의 국경 문제를 연구한 것이다.
서 교수는 “동북공정 자체는 수개월 전에 마무리됐으며 보고서 발표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만 남은 것으로 안다”며 “이 보고서에 이미 공개된 최소한의 연구결과만 실릴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현실적인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동북공정을 진행해 온 중국에 비해 한국정부는 8월 ‘한국고대사 정치쟁점화 금지’ 구두양해 이후 2년간 허송세월만 보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외교적 대응을 전혀 하지 않고 동북공정 과정을 알면서도 중국과의 마찰을 우려해 여러 문제의 은폐를 기도했다.
그리고 한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동북공정에 대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중국은 은밀히 다른 기관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해 왔다. 때문에 한국은 초기에 동북공정의 목적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정도로만 파악해 동북공정의 내용과 목적, 파급효과 등에 대한 정확한 파악 및 대응책 마련에 차질을 빚었었다.
중국의 현지 대학의 양 모 교수는 “한국 사학계에서 대응책으로 내놓은 논문집 등을 보면 중국인들의 연구결과를 번역한 뒤 명확한 근거 없이 대응논리를 전개해 놓은 것들이 많다. 꾸준히 중국 내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현실적인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중국 논문을 번역한 뒤 그에 대한 대응 논리를 내세우는 급급한 한국 사학계의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덧붙여 “정부가 고구려 역사재단을 동북아 역사재단으로 통합, 출범시키며 의욕을 보이긴 했지만 여론이 잠잠해지면 같이 침묵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며 “현지 분위기 파악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전문 인력을 집중적으로 가동해 앞으로 예상되는 중국의 행보 파악에도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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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기원 자체를 바꾸려는 ‘탐원공정’
지난해 6월에는 중국 선양(瀋陽) 랴오닝(遼寧) 성 박물관에서 ‘요하문명전’이 열렸다.
요하문명전의 주된 테마 ‘화하일통’. 즉, 화하민족(중국)의 이름아래 하나로 통일한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일반 전시회와 다를 것 없는 이곳은 고구려의 옛 역사를 빼앗으려는 동북공정의 본체가 되는 역사왜곡의 집합소이다. 요하문명전에는 발해가 당나라 영토로 표시된 지도를 걸어놓고 당나라의 일개 군 정도인 ‘발해도독부로 지칭’하고 있다. ‘부여는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다’ ‘부여는 중국 한나라의 신하였다’ ‘고구려는 중국 서한의 현토군에서 세워졌다’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요하문명전 첫머리에는 ‘3황5제 시대 중국·중화민족은 다민족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바탕을 이루었다. 중원의 신농씨 화(華)족 집단, 동남 연해의 샤(夏)족 집단, 동북 옌산(燕山) 남북의 황제 집단, 3개 집단이 중화민족의 바탕을 이루었다’라고 되어 있다. 요하문명은 황제 집단에 들어가고, 고구려와 부여 유물은 모두 요하문명의 한 부분으로 전시되어 있어 누가 보아도 고구려와 부여는 중국 황제의 후손으로 알게 되어 있다.
항상 황하문명의 우수성을 과시했던 중국, 그런데 과거 고조선 무대였던 요하유역 등에서 황하문명보다 훨씬 앞서는 고대문명이 발견됐다. 그러자 중국은 이것들까지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1천년 앞선 ‘홍산문명’ 그 발생지는 요하문명으로 중국 한족이 아닌 요하지역의 몽골, 만주, 한반도 북방민족이 만든 문명이다. 그런데 중국은 ‘요하문명전’이라는 전시를 통해 억지논리로 요하지역의 모든 문명을 중국 역사로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고조선부터 시작되는 5500년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모두 중국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뒤흔드는 대사건인 것임에 틀림없다. 탐원공정대로라면 고구려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기원 자체가 중국. 세계 4대 문명보다 오래된 세계 최고의 대 중화문화권 건설을 위한 치밀하고도 은밀한 프로젝트. 동북공정보다 더 치밀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