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하원 사상 첫 ‘위안부 청문회’

2007-03-15     글/ 이현지 기자
타국에서 울린 절규 “우리는 사죄를 원한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역사 바로 세우기, 위안부 결의안 처리 요구
지난 2월15일(현지시간) 미국 하원 레이번 빌딩에서 열린 외교위원회 아·태 환경 소위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장에서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20세기 최악의 인권유린이 심판대에 올랐다. 증인으로 나선 한국인 이용수, 김군자, 호주 국적의 네덜란드인 얀 러프 오헤른 할머니 등 3명은 반세기도 더 지난 기억 저편에서 야만의 시간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일본정부가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뒤틀린 역사를 후손에게 대물림하려는 데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청문회장을 울렸다.

“하루 평균 군인 4~5명으로부터 강간을 당하면서 죽으로 연명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가해지는 폭행에 개, 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했다” 지난 2월15일 열린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안부 청문회’에서 이용수(79) 할머니는 절규했다. 청문회에는 이 할머니와 김군자(81), 네덜란드계 호주인 얀 러프 오헤른(85) 할머니 등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 3명이 미 의회 사상 처음으로 증인으로 참석했다. 세 할머니는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 과정, 일본군으로부터 겪은 수모와 강간 등을 낱낱이 증언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역사 바로 세우기, 위안부 결의안 처리 등을 요구했다.
일본계 미국인 마이클 혼다(Honda·민주) 등 민주당 의원 5명과 그리스토퍼 스미스 등 공화당 의원 2명은 지난 1월31일 일본군 성노예는 일본 정부가 저지른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 사건이며 집단 강간, 강제 낙태, 정신적 모욕, 성적 학대 등으로 신체적 장애, 학살 또는 자살이 포함된 전례 없이 잔인하고 중대한 사건이라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결의안을 제출했다. 결의안은 특히 일본 정부 측에 ▲위안부의 존재 공식 인정과 사죄 ▲일본 총리의 공식 사죄 ▲국제사회의 권고에 따른 현재와 미래 세대에 교육시킬 것을 권고했다.
이날 김동석 뉴욕한인유권자센터 소장은 뉴욕 한인 4,000여 명이 서명한 일본군 위안부 비판 결의안 지지 서명록을 전달하기도 했다.


‘야만의 日軍’ 만행 낱낱이 증언해
먼저 증언에 나선 이용수 할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만 14세 때인 1944년 집에서 잠을 자다가 느닷없이 끌려갔던 당시 정황을 소개했다. 대구에서 살던 이 할머니는 일본군인과 한 여자어른에게 이끌려 곧바로 기차 편으로 부모 품을 떠나야 했다. 울부짖는 그를 일제 군인들은 마구잡이로 폭행했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귓전에는 “조센징”이라는 말만 울렸다. 그의 지옥생활은 중국 다롄에서 군인 300여명과 함께 오른 배에서부터 시작됐다. 배멀미를 앓던 끝에 달려간 화장실에서 한 군인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폭행을 당했다. 이 할머니는 끝내 눈물을 훔쳐내야 했다. 그는 “일본 정부는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면서 “내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전 세계 성폭력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전쟁 중 성폭행은 없어져야 한다”는 말로 증언을 맺었다.
네덜란드령 자바섬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오헤른 할머니의 증언은 적어도 미국인들에게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는 1992년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과거를 공개하기 전까지 아무도 모르게 자서전을 집필했다. 미리 적어온 글을 토대로 증언이라기보다는 잘 정리된 연설을 했다. 21세이던 44년 어느 날 다른 네덜란드인 처녀 9명과 함께 일본군 장교들에게 끌려간 보고르 수용소의 위안소를 잊지 못한다. 식당에 모아놓고 한명씩 어디론가 데려갔다. 곧이어 어김없이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끌려간 방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죽이겠다”는 협박 속에 ‘잔인한 방식’으로 순결을 잃었다. 곧바로 목욕탕으로 달려가 씻고 또 씻었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곧이어 방에 들어선 또 다른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심지어 성병검사를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일본인 의사에게도 강간을 당했다. 추해보이면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리를 깎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3번 유산을 해야 했다. 그는 “위안부 피해자들은 50년 동안을 침묵 속에 살았다”면서 “지금도 악몽을 꾸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위안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범죄”라면서 “미 행정부가 2차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 수용한 사실을 행동으로 사과했듯이 일본 정부도 분명한 행동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유창한 영어로 이뤄진 오헤른 할머니의 증언에 청문회장을 메운 청중과 각국 취재진은 숨을 죽여야 했다. 그는 “일본 정부는 92년 아시아여성재단을 만들어 희생자 보상에 나섰지만 이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모욕이었다”면서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증언에 나선 김군자 할머니 역시 꽃다운 16세에 광기 어린 일본 군인들의 성 배출구가 돼야 했다. 42년에 끌려간 김 할머니는 3년 동안 혹독한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하루 평균 20명에서 많게는 40명까지 상대했다”면서 “줄을 서서 들어오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누워서 당해야 했다”고 절규했다. 자살을 기도했지만 위안소 책임자에게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다. 상대하던 부대가 전방으로 이동하면서 김 할머니도 따라가야 했다. “군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더 광적이었다”면서 “나를 인간으로 보려 하지 않았다”고 울먹였다. 전쟁이 끝나자 위안소 주인은 빈털터리였던 한국인 위안부들에게 그냥 “집으로 가라”고 내쫓았다. 20명 중에 7명이 살아남았다. 중국 훈춘에서 한 달 보름을 걸어서 백두산 인근으로 왔고 두만강을 건너면서 1명이 물살에 휩쓸렸지만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었다. 다시 열차에 매달려 돌아온 고향에서는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에서 재회한 사랑하던 남자는 가족의 반대로 끝내 자살했다. 유복자로 낳은 딸도 5개월 만에 숨졌다. 그는 “죽기 전에 일본의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미국 땅까지 왔다”면서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세 할머니는 증언을 마치고 함께 서명한 성명서를 소위에 제출했다. 성명에서 이들은 “우리는 끊임없이 진실과 정의를 요구했지만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아무런 공식 사과를 받아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면서 “이번 결의안을 통해 미국 의회가 일본정부로 하여금 과거 전쟁범죄에 대해 정의를 일깨우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비통의 눈물이 함께한 생생한 증언
때로는 더듬대고 주어 동사가 연결되지 않는 서툰 말솜씨였지만, 누구도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안고 살아온 군위안부 피해자 세 할머니들이 털어놓는 진실 앞에서 청문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과 의회 관계자들은 때론 깊은 탄식을 내쉬고 때론 전율하며 몸을 움츠렸다.
“발로 차며 저항하자 일본군 병사는 칼을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위협했어요. 사냥당한 동물처럼 구석에 웅크린 채 간청했어요. 기도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제가 기도하는 동안 그 병사는 옷을 벗었어요…. 겁탈당하는 내내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렀습니다. 병사가 방을 떠난 뒤 한동안 부들부들 떨다 찢겨진 옷가지를 챙겨 들고 목욕실로 도망갔습니다. 함께 끌려왔던 다른 소녀들도 와 있더군요. 우리는 울면서 몸을 씻고 또 씻었습니다. 모든 고통과 치욕이 물에 씻겨 가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그 밤은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밖에는 더 많은 일본군이 기다리고 있었고 지옥 같은 시간은 날이 새도록 계속됐습니다”
특히 오헤른 할머니는 “일본군이 내 몸과 내 자존심과 내 가족을 앗아갔지만 하느님에 대한 나의 사랑은 빼앗지 못했다”면서 “50년 동안 침묵하다 지난 92년 한국인 종군위안부들이 TV에 나와 일본군 만행을 고발하는 것을 보고 종군위안부 고발에 동참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헤른 할머니가 ‘위안소’에서 겪었던 참상을 낱낱이 증언하자 결의안 제출을 주도한 일본계 마이크 혼다 의원의 입에서도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팔짱을 끼고 있던 로라바허 의원도 점점 심각한 표정으로 두 팔로 턱을 괸 채 귀를 기울였다. 오헤른 할머니는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 위안부들에게는 끝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내 청춘을 무참히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며 “일본은 전쟁 당시의 잔학 행위를 시인하고 역사를 똑바로 가르쳐라”고 일갈했다.
김군자 할머니는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며 16세 때 끌려가 겪은 위안부 생활을 증언했다. “끌려간 첫날 저항하다 맞아 왼쪽 고막이 터졌고 그 뒤 3년간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아 지금도 너무나 많은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하루 수십 명의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습니다”


일부 日의원, “사과 할 만큼 했다”
결의안을 혼다 하원의원은 “지금 우리가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일본 정부로 하여금 위안부들이 당한 고통에 대한 책임을 시인하도록 할 역사적인 기회를 잃게 된다”며 “일본 정부가 명확하고 분명한 사과를 해야 진정한 화해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문회에선 일본을 두둔하는 미 의원들의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위안부를 포함한 일제의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리였다.
이날 청문회에서 공화당의 다나 로라바허(캘리포니아) 의원은 “일본이 1994년 이후 여러 차례 총리 발언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사과했다”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사과를 하라는 것이냐”고 위안부들을 힐난했다. 그는 “현재의 일본이 앞선 세대의 잘못으로 인해 처벌받아서는 안 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일본을 두둔했다. 로라바허 의원은 혼다 의원이 제출한 결의안을 겨냥 “그들이 요구하고 있는 사과의 조건도 일본은 이미 충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극우적 성향으로 중국을 경계해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며, 한국의 반미감정에 ‘분노감’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당의 스티브 샤보트(오하이오) 의원도 이 문제를 물질적 보상 차원으로 접근했다. 샤보트 의원은 “위안부 가운데 283명이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면서 “나머지 위안부들에게 돈을 지급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청문회를 주재한 에니 팔레오마바에가 소위원장은 “일본이 역사를 되돌리려 한다”고 비판하면서도 ‘미국이 다른 나라 정치에 얼마만큼 간섭할 수 있는가’를 놓고 위원회 내부에 이견이 있다고 인정했다. 주미 일본대사관도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섰다. 가토 료조 주미 일본대사가 위원회에 보낸 서한을 통해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책임을 인정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문회 증인으로 참석했던 아시아폴리시포인트의 민디 코틀러 국장은 “일본의 사과는 총리의 개인적인 것이었으며, 정부 차원에서는 사과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의 행태는 가부키(가면) 연극을 보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상황이 묘하게 흐르자 이용수 할머니는 청문회가 끝난 뒤 기자에게 로라바허 의원의 발언을 지목하며 “위안부들이 받지 못한 사과를 미국 의원이 대신 받았단 말이냐”고 반문하면서 “문제를 감추려는 일본 행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분을 삼켰다.
청문회 직후 일본 기자들은 청문회 주최에 앞장서고 직접 증인으로도 참석했던 혼다 의원에게 몰려가 “도대체 위안부 결의안을 제출한 이유가 뭐냐”고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혼다 의원은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응대했다.

日 외상 “미 군위안부 결의안 유감”
아소 다로 일본 외상은 지난 2월19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미국 하원에 제출된 데 대해 유감을 나타냈다.
아소 외상은 “결의안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며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 담화 등) 일본 정부의 대응을 고려하지 않아 심히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결의안은 일본군이 젊은 여성을 강제적으로 성노예로 삼고, 결국은 살해하거나 자살로 몰아넣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외상은 같은 인식인가’라는 자민당 의원의 질문에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입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베 신조 총리는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되면 파문이 클 것으로 보고, 19일 세코 히로시게 홍보담당 보좌관을 미국에 보내 언론과 의회를 상대로 일본 정부 견해를 설명하도록 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미 주미 일본대사관은 “(결의안은) 일본이 이미 실시한 것을 다시 요구하는 등 부적절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내용의 비판 성명을 내는 등 채택 저지 운동에 착수했다.
미국 하원에서는 1996년 이후 일본군 위안부 관련 결의안이 8번 제출돼 모두 폐기됐다. 그러나 민주당이 의회 다수파가 된 만큼 이번에는 통과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일본 정부는 우려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이 없으나 4월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고 전했다.
한편, 자민당 우파들은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한 고노 전 관방장관 담화의 수정을 요구하는 제언을 아베 총리에게 제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팔레오마바에가 위원장과의 인터뷰 내용
‘위안부 청문회’를 주재한 에니 팔레오마바에가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은 일본의 위안부 강제동원은 피해자들의 인권과 존엄을 중대하게 훼손한 행위라고 지적하고 마이크 혼다 의원 등이 제출한 ‘위안부 결의안’이 의결되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오늘 결과에 만족하나.
-아직 만족을 얘기할 때가 아니다. 위안부 결의안이 의회를 통과해야 만족할 것이다.
▶왜 청문회를 열었나.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했을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본을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 일본 친구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 내가 소위원장이기 때문에 이 일을 맡아야 했다. 이것은 옳은 일이기 때문에 기꺼이 소임을 수행한 것이다.
▶일본 정부로부터 어떤 압력을 느끼지 않나.
-물론 느낀다. 일본은 나름대로의 논리와 입장이 있다. 그러나 위안부가 일본 군부에 의해 동원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숫자도 20만명이나 된다.
▶미국 정부로부터는 어떤 입장을 전달받고 있나.
-우리 정부로부터도 압력을 느낀다. 공화당 정부니까 공화당 의원들을 통해 의견을 전해온다. 미·일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공화당 논리다.
▶그런 압력들이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는 데 영향을 받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난 의회에서 외교위원장을 맡았던 헨리 하이드 의원도 공화당 소속이지만 위안부 결의안을 지지했다. 하이든 의원도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고 실제로 두 나라에서 역사적 문제를 체험한 뒤 입장을 바꿨다. 낸시 펠로시 의장과 톰 랜토스 외교위원장 등 하원 지도부의 입장은 확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