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마재와 다산 왕래하며 집필한 실학서적

조선후기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의 정신세계

2019-01-30     오경근 기자 / 이관우 기자

(시사매거진250호=취재_오경근 칼럼니스트/ 사진_이관우 기자)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하남IC에서 팔당대교를 건넜다. 그곳에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능내리를 지나 마재고개로 접어들면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대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생가와 무덤 그리고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실학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일명 다산유적지로 불리는 곳이다. 평소 바람을 쐬기 위해 종종 찾는 이곳은 강변에 다산생태공원이 조성돼 있어 팔당호의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매우 자연친화적인 정서를 전달해준다.

무엇보다 경세치용의 실용적인 학문(이하 실학)을 주장하며 공리공론으로 흐르던 정치 상황을 비판하고 민생구제를 위해 새 길을 제시한 ‘성호 이익(李瀷)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아 4서6경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1표2서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다산 정약용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어 매우 유서가 깊다.

더욱이 조선후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사상은 기존의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 ‘국태민안’ 이상적 국가를 지향한다. 그러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수많은 제자 중 하나가 되어, 나 역시 정신적 스승을 찾아 다산유적지로 발길을 옮긴다.

 
겨울 찬바람에 이파리를 떨어뜨린 나목들이 고동빛 침묵 속에 잠겨 있다. 빈 들녘을 바라보면 머물던 것들이 떠나거나 소멸해버린 자리에서 쇠잔한 햇살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꽃만이 희디흰 웃음으로 반겨준다. 조락과 공멸의 시간이 훑어간 자리에서 미욱한 제자 한 명이 사별한 스승의 처마 밑을 찾아들 듯 감회에 젖는 마음 또한 촉촉하다.
 

팔대옥당의 정약용, 학문에 뛰어난 가계도 보유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 선생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옛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낮은 산턱에 보존돼 있다. 숙부인 풍산홍씨와 합장한 묘지로써 그 아래 팔당수몰지구 안에 위치해 있던 생가를 옮겨와 ㅁ자 모양의 가옥으로 재현했다. 비록 권세와 벼슬에 가까운 집안은 아니었으나 8대가 연속으로 홍문관에 기용될 만큼 학식이 뛰어나 세간에서는 ‘팔대옥당(八代玉堂)’ 양반 명문가로 불렸다.

특히 정조 7년(22세) 생원시에 합격하고, 정조 13년(28세) 대과에 급제한 다산 정약용은 정조로부터 총애를 받은 문신 중 최고의 학자다. 그런 그는 1762년(영조38년) 음사로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1730~1792년)과 어머니 해남윤씨(1728~1770년) 사이에서 5남3녀 중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무엇보다 어머니 해남윤씨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으로, 학자이자 화가로 유명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기도 하다. 학문과 벼슬로 이름이 높았던 호남의 대표적 남인계 집안이다.

그런 정약용 선생에게는 위로 의령남씨 소생의 맏형 정약현과, 어머니 해남윤씨 소생의 둘째형 정약전, 셋째형 정약종이 있다. 그리고 누나와 매형인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 이승훈(李承薰)이 있다. 또한 서모인 잠성김씨 소생인 다섯째 동생 정약횡과 2명의 누이가 있어 모두 8남매다.

이러한 다산의 집안은 실학사상 외에도 서양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핵심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먼저 맏형 정약현의 부인인 경주이씨는 동생으로부터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인 신도고, 그 동생 ‘광암(曠庵) 이벽(李蘗)’은 조선 최초로 천주교를 창설한 사람이다. 또한 정약현의 맏딸 정명련은 남편 황사영(黃嗣永)을 전도해 신유박해 때 제천 배론에서 백서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셋째형 정약종은 작은부인 유소사, 큰아들 정철상, 딸 정정해, 작은아들 정하상과 더불어 천주교를 믿다가 신유년 박해 때 순교한 인물이다. 그 외 해남윤씨 가문의 외사촌 윤지범과 윤지눌, 그리고 6촌인 윤지충 등이 천주교를 전파한 인물들이다.

문도공 정약용, 정조의 총애를 받다

정조 때 문신인 정약용의 자는 귀농(歸農)과 미용(美庸)이며, 호는 사암(俟菴), 채산(菜山), 근기(近畿), 탁옹(籜翁), 태수(苔鬚),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여유당(與猶堂), 다산(茶山) 등이 있다. 또한 사후 내린 왕의 시호는 문도공(文度功)이다.

그는 남인 가문의 출신으로 정조 때인 1789년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희릉직장을 시작으로 벼슬살이를 했다. 정조 제위기간 동안 10여 년 넘게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나 사후에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미움을 받아 청나라 유학시절에 접한 서학(천주교)에 연류 되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한다.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공부를 잘 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은 7세 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란 시를 지어 부친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9세 때 어머니 해남윤씨를 여의고, 10세 때 전라도 화순과 경상도 예천, 진주 등지에서 목사를 지낸 부친에게 경서와 역사를 배우며 과거시험을 준비한다.

이후 15세 때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홍화보의 딸 풍산홍씨와 결혼하여 서울생활을 시작한다. 이듬해인 1776년 실학의 선구자인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을 접하고, 그의 문하생이며 시문과 학문에 조애가 깊은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이벽(李蘗) 등을 만나 교류한다. 모두 당대 유능한 남인계 소장학자 출신이다.

이어 22세 때인 1783년에는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고,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학문을 인정받으며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된다. 그리고 28세 때인 17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식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첫 관직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쳐 경기도 암행어사에 이른다. 이를 통해 관리의 책임과 의무를 절실하게 깨닫고 <목민심서>의 초안을 구상하게 된다. 또한 그즈음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고,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해 경비를 절약한다.

유배시절 정약용, 사의재에서 집필활동에 몰두하다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일생일대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커지면서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이 발발한다. 이때 다산 정약용 선생 역시 천주교 집안이라는 명목으로 연류 되어 유배형을 받게 된다. 맏형 정약현은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고향 마재마을에 남았으나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가고, 셋째형 정약종은 고문 끝에 옥사한다. 그리고 넷째 정약용 선생은 포항 장기로 유배된다.

이후 9개월이 지나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백서사건을 일으키자 정약용 선생을 다시 서울로 불러올려 문초를 가한다. 그리고 그해 11월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 선생은 강진으로 유배된다. 형제는 나주 율정까지 함께 가다 눈물로 헤어진 뒤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정약전이 흑산도와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사망한다. 이후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간다.

다행히 그의 유배지는 외가인 해남윤씨 본가가 있는 곳과 지척이었고, 외가에 장서량이 방대해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토대가 돼주었다. 더욱이 해남에 있는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를 배출한 해남윤씨의 종가로써 그 안에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에 만여 권의 서적이 비치돼 있었다. 정약용 선생은 “이제야 내가 겨를을 얻었구나!” 마음을 돌리며 학문과 저술활동에 전념한다.

이후 그는 강진에서 4곳을 전전하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중 첫 번째 머문 곳이 ‘사의재(四宜齋)’다. 1801년 추운 겨울, 강진에 도착한 정약용 선생은 대역 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의 괄시를 받으며 추위와 굶주림에 처했을 때 동문매반가의 주모한테서 도움을 얻었다. 그는 주모가 운영하는 객주에 거처할 장소를 마련하고 ‘4가지 마땅함’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생각은 맑아야 하고, 용모는 장엄해야 하고, 말은 과묵해야 하고,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집필활동에 열중한다.

실학사상의 정약용, 다산초당에서 후학을 양성하다

전남 강진에 내려간 지 7년 후인 1808년에는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짓고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학업을 열어가며 11년 가까운 세월을 집필활동에 몰입한다. 다산초당에서 수학한 다산18제자와 과거 읍중시절 수학한 읍중제자가 그를 도와 500여권의 저서를 남기는데 일조했다. 그중 이청, 황상, 이강회, 이기로, 정수칠, 윤종문 등이 있다. 또한 읍중시절 은둔해 살던 향리의 지명을 차용해 ‘다산(茶山)’이라는 호를 짓고 문인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이때 다산 정약용 선생은 4서6경 연구와 더불어 1표2서인 경세학 연구서 <경세유표> <목민심서>를 집필했다. 그리고 미처 끝내지 못한 <흠흠신서>는 고향으로 돌아가 저술을 마쳤다. 또한 수많은 서정시와 사회시를 지어 19세기 초반 강진 일대의 풍속과 세태를 묘사해 시대에 경종을 울렸다. 아울러 232권의 경집과 260여 권의 문집을 집필한다. 특히 압제와 핍박에 시달리던 농민의 참상을 시어로 대변해 큰 호응을 얻는다.

드디어 18년 유배를 마치고 57세 되던 해 가을에 유배지에서 돌아온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시절 집필한 저서를 수정·보완하고,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는 데 남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어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했으며 <흠흠신서>와 <아언각비> 등을 보완했다.

그리고 회갑 때에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고, 북한강을 유람하며 사유하는 여생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소론계 신작, 노론계 김매순, 홍석주 등과 같은 석학들과 만나 학문을 토론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르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1836년, 60주년 결혼기념일인 회혼일에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 때의 일이다. 이어 숙부인 풍산홍씨도 2년 후에 세상을 떠나 그와 함께 묻혔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군자유삼락, 수종사(水鍾寺)

팔당댐 정문으로 올라가는 조안면 북한강로 433번길에는 신라 천년의 고찰 <수종사>가 있다. 이곳은 1458년 세조가 금강산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두물머리,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깼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후 부근을 조사하라 명하자 군사들은 주변에 바위굴이 있고 그 안에 18나한이 있으며 굴 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왔다고 보고한다. 또한 세조는 이곳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라시대 암자임을 깨닫고 ‘수종사’라는 이름을 붙여 외연을 넓힌다.

이렇게 운길산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점으로 이미 신라 때부터 작은 암자가 세워져 있던 곳이다. 따라서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서·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불렀다. 봄·여름·가을·겨울 연중 내내 신록·단풍·설경이 신비스러우며, 일출·일몰·운해 등 어느 시간의 풍광이라도 대단히 아름다운 전망을 지니고 있는 조망지점으로 경관가치가 크다.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 했던 곳으로 역사문화 가치가 높은 곳이며, 또한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써 차문화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현재 수종사는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다실을 지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으며 차 문화를 상징하는 사찰로 이름이 높다.(나무위키-수종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