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통해 한반도 통일의 롤모델 구한다

남측의 ‘작은 통로론’ & 북측의 ‘오솔길론’

2015-03-03     안수지 기자

독일의 통일 과정은,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리가 내놓은 ‘동방정책’에 따라 동서독기본조약이 만들어지고, 20년 동안 정권에 관계 없이 일관된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한 결과 보수당인 기민당 헬무트 콜 총리가 통일의 대업을 이뤘다. 콜 총리는 야당시절 동방정책을 맹렬하게 반대했지만, 1982년 집권이후 야당시절과는 달리 동방정책의 기조를 착실히 계승했다. 한국의 경우 보수정권인 노태우 정부가 내놓은 7?7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를 바탕으로 하여 진보정권인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도출했다. 하지만 ‘실용주의를 표방한 보수정권’인 MB정부가 출범하면서 화해협력정책은 중단됐다. 남북관계 재조정 실패로 기존 합의들은 사문화되고 말았다.

   
 

1988년 1월, 동독에서 로자 룩셈부르그 사망 기념행사를 계기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이어 1989년 5월 지방선거의 부정으로 인해 저항세력이 조직화되기 시작했고, 초여름부터는 라이프치히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여행의 자유’ 등 개혁을 요구하며 ‘월요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는 처음 7만 명 규모에서 12만 명으로, 그리고 50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10월 말 일어난 시위는 동베를린, 드레스덴 등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11월4일에는 100만 명이 동베를린 시위에 참가했다. 
그리고 1989년 5월2일,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와 국경 지대에 설치한 철조망을 철거했다. 그 일을 계기로 동독 여행자들이 서독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 주재 서독대사관과 동베를린 주재 상주대표부에 동독 탈주민들이 많아졌다. 이어 9월10일에는 헝가리 정부가 국경을 개방하고 동독인의 출국 여행을 허용하여 3만 명 이상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11월9일에는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이후 주요 분야의 인사들이 서독으로 이주하여 사실상 동독은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1989년 10월17일, 정치국 회의에서 동독 총리 슈토프가 호네커의 사임을 주장하고 이러한 제안을 정치국원이 지지하였다. 다음 날, 호네커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를 발표한 후 에곤 크렌츠가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2월1일에는 동독 헌법에서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조항이 삭제되었고, 1989년 12월3일 동독 공산당 중앙위와 정치국이 해체되었다.

라이프치히, 동베를린, 드레스덴 등지에서 일어난 1989년 11월20일 일어난 시위에서 시민들은 ‘우리는 한 민족이다’는 구호를 외치며 통일을 요구하였다. 동독 주민의 서독 이주를 막고, 동독 상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통일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는 1989년 11월28일 <조약공동체 → 국가연합적 구조 → 연방식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10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1989년 12월19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양 독일 정상 간 회담에서 1990년 4월까지 양 독일 간 조약 공동체를 형성하기로 합의하고, 조약 체결을 위한 분야별 정부 간 협상을 개최했다. 모드로 총리는 자유, 평등, 비밀, 보통 선거의 4대 원칙이 보장되는 민주적 선거법을 제정하고, 시장경제원칙에 따른 정책 변화와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헌법과 형법을 개정하고 정치범을 석방하는 등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1990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제2차 정상회담을 서독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동독에서 변혁(Wende)이 시작되면서 서독 정부는 동독 측에 민주화와 개혁, 특히 자유선거를 실시하라고 촉구했다. 이를 위해 여행, 언론, 정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산당의 권력독점을 포기할 것과 정당설립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개혁도 일어났다. 이에 한스 모드로 동독 총리는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한 원탁회의와 협상을 벌여 동독의 정치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기총선에 합의하였고, 원래 5월 6일로 예정된 총선을 3월18일로 앞당겼다.
서독 정부는 동독의 선거를 위해 물적, 인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정당과 정치인은 자매정당을 조직하고 선거 유세를 지원하였다. 그에 따라 서독 마르크화(DM)의 즉각적인 도입과 조속한 통일을 공약으로 내세운 기독교민주연합 중심의 ‘독일연맹’이 결성되어 자유화를 주도함으로써 화폐통합과 통일과정이 더욱 가속되었다.
동독과 서독은 ‘선 경제개혁 후 화폐통합’이라는 단계적 통합방안도 고려했다. 하지만 동독 이주민의 증가, 동독 주민의 서독 마르크화(DM) 도입 요구, 동독 마르크화의 가치상실 등 정치, 경제, 사회적 이유로 급진적 통합을 결정했다. 또한 1990년대에 들어 동독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서독은 단계적 통합에서 조기통합으로 정책을 수정하게 되었다.
‘콜-모드로 제2차 정상회담(1990년 2월13일 ~ 1990년 2월14일)’에서 서독의 콜 총리는 특정한 날짜를 기점으로 하여 동독의 통화단위와 법적 지불수단을 서독 마르크화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양 독일 간 화폐통합과 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한 협상기구인 ‘공동전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1990년 4월25일에서 5월17일까지 6차례 전문가 전체회의와 소회의가 개최되고, 1990년 5월 18일 동독과 서독은 화폐· 경제·사회통합에 관한 국가조약에 서명하는 등 자유선거에 따른 민주 합법정부의 출범 후 화폐통합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90년 2월12일에서 13일, 오타와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와 바르샤바조약기구(Warsaw Treaty Organization) 회원국 간에 ‘영공 개방(open sky)’회담이 개최되었고, 독일 통일과 그 관련국들의 문제해결을 위한 ‘2+4 회담’의 개최가 합의되었다.
독일 통일에 대한 대외적 장애요인 중 가장 큰 것은, 통일 독일의 동맹체 소속과 독일과 폴란드 간의 국경선 문제였다. 1990년 7월15일에서 16일, 이틀에 걸친 독·소 정상회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통일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회원국 잔류에 동의하였다. 이후 1990년 9월12일 4차례 외상회담을 통해 ‘독일 관련 최종 해결에 관한 조약(2+4 조약)’에 합의하고 서명하였다.
이렇게 독일 통일의 완성은 빠른 시간 내 진전되었다. 1990년 8월22일 전독총선을 위한 선거협약이 체결되었고, 같은 해 8월 동독인민의회는 기본법 제23조에 의거해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편입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8월 말 통일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서독 각 부처는 동독의 현행 법률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서독 법규의 독일 전 지역 적용 여부를 조사하고, 동·서독 부처 간 협의를 통해 통일조약 조문을 작성하였다. 10월3일경 독일의 통일이 선포되었고, 다음 날에는 베를린 제국의사당에서 최초의 전독의회가 개최되었다. 전독의회에는 구동독 인민의회 의원 144명도 참석하였다. 이후 1990년 12월2일 전 독일 총선이 실시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안은, 주민들의 개혁요구가 여행, 언론의 자유에서 자유선거 등으로 고조되어 간데 반해, 동독 지도부는 시의 적절한 개혁을 거부함으로써 정권의 붕괴를 가속화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독일이나 베트남, 예멘 등 통일을 달성한 나라들은 거창한 통일 청사진과 방안에 의해 목적을 실현한 것이 아니다. ‘숨겨진 통일전략’에 의해 통일을 달성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서독은 ‘동방정책’에 따라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일관성 있는 교류협력을 추진했다. 독일은 이미 25년 전에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통일을 달성했다. 무력으로 적화통일을 한 것이 아니다.
탈냉전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조류와 동서독간의 꾸준한 교류협력이 장벽을 붕괴시켰다. 서독의 ‘작은 발걸음 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 전략’은 동서독 간 인적?물적 교류를 꾸준히 확대하면서 상호이해의 폭을 넓혀나갔다. 독일통일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요인은, 사회주의권 개혁?개방과 미?소간의 평화공존합의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통일달성의 유리한 환경으로 활용해서 통일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헬무트 콜 전 서독 수상이 말한 것처럼, 독일은 역사가 열어준 ‘기회의 문’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문 안으로 들어가 통일을 달성했다.
하지만 현재 한반도 통일의 경우 아직 일관성이 없고 전략도 구체적이지 않다. 또한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통일의 촉진요인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동서독의 경우 수많은 간첩사건과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인에 대한 총격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류협력을 지속하여 결국 통일을 달성했다.
한반도는 2008년 7월11일 금강산관광객 피격사건 이후 관광은 6년째 중단되었고, 2010년 3월26일 천안함 폭침사태 이후 5?24조치가 취해져 남북교류협력은 4년째 거의 중단된 상태다. 게다가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과 장거리로켓발사에 따른 유엔차원의 대북제재와 남북관계 차원의 제재강화로 통일을 위한 작은 통로가 거의 다 막혀버렸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현재의 남북관계는 규범적, 도덕적 기준만으로 풀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각 연구기관에서 수많은 통일 방안을 내놓고도 통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통일방안이나 급변사태론 등 거대 담론보다는 실천 가능한 ‘작은 발걸음’을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고 조언한다. 
이어 고유환 교수는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토대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성격을 초월한 일관된 정책기조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현 정부의 남북관계 발전전략은 민생통로에 의거한 ‘작은 통로’ 전략인 반면, 북한의 ‘오솔길론’은 정치군사적인 측면을 우선시 하는 ‘작은 통로’ 전략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같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호혜적인 접촉통로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국회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실질적인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토대로 남북국회회담도 추진해야 할 것이다”고 덧붙인다.  

   
 

지난 2014년 8?15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남북이 실천 가능한 사업부터 행동으로 옮겨서 서로의 장단점을 융합해 나가는 시작을 해 나가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남과 북은 서로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작은 통로부터 열어나가고, 이 통로를 통해 서로 이해하며, 사고방식과 생활양식부터 하나로 융합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박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환경협력의 통로’, ‘민생의 통로’, ‘문화의 통로’를 시급히 열자고 북측에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은 작은 통로부터 열자는 남측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정치군사적 대결을 해소하는 ‘근본문제’부터 해결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북한이 상호 적대적 군사행동 중지와 남북대결의 악순환의 고리 끊기, 북미 적대관계 해소와 평화협정 체결 등 한반도 근본문제를 제기하는 데 비해서, 박근혜 정부는 비핵화와 관련한 진정성 있는 행동, 관광객 피격사건, 천안함-연평도사태 등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 등을 요구하며, 인도적 대북지원과 동북아국가들 사이의 비정치적 분야에서 협력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남과 북이 작은 통로를 열기 위해서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로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동을 중지하고 평화구축에 대한 진정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 박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정착이 이뤄져야 교류협력이 확대될 것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이러한 제안에 대해 “지금과 같이 북남사이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가 최악의 형편에 이른 조건에서 그것이 과연 실현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북남합의들을 전면 이행하고 6.15 통일시대에 활성화되어온 각 분야별, 분과별 협력교류기구들을 되살리면 북남관계는 저절로 개선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난 10월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갑자기 참석했다. 남북 간 고위급 접촉이 이뤄짐과 동시에 남북관계 복원의 계기가 다시 마련되는가는 기대치가 생겨났다.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국가체육지도위원장 겸 당비서, 김양건 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 등 북한권력의 최고실세 3인이 인천을 방문하여 우리 정부 인사들과 접촉하여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에 2차 남북고위급접촉을 갖기로 합의했다.

정홍원 국무총리를 만난 황병서 군총정치국장은 “이번에 좁은 오솔길을 냈는데 앞으로 대통로로 열어가자”고 말했다. 북한 측의 ‘오솔길론’은 작은 것에서부터 신뢰를 쌓아 관계를 개선해나가자는 남한 측의 ‘작은 통로론’과 맥락이 이어진다. 그동안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 등 ‘근본문제’ 해결을 앞세우던 북한이 남한 측이 견지해온 단계적, 기능주의적 접근 방식에 어느 정도 호응하는 의미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주장한 ‘작은 통로’는 민생통로이다. 반면 북한이 생각하는 ‘오솔길’은 정치군사적 통로를 의미한다. 따라서 남측의 ‘작은 통로론’과 북측의 ‘오솔길론’이 이익의 조화를 이룰 합일점을 찾기 위해서는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호혜적인 접촉통로를 많이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란 전문가들의 분석이 뒤따른다.
[자료 : 국회예산정책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