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담은 민간외교로 일평생을 오롯이 국가 위해 살다

일명 ‘코리아게이트’ 주인공 박동선 씨, “파란만장했으나 후회 없는 삶”

2014-12-05     신현희 부장

그는 ‘박동선’이라는 이름보다 ‘코리아게이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당시 존재감 없는 우리나라와 거대공룡인 미국을 뒤흔들었던 사건,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세월이 흐르고 그의 나이 벌써 여든을 바라보지만 여전히 꼿꼿한 표정과 말투를 보아 젊은 시절의 그는 대단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굳이 코리아게이트의 주인공으로 오버랩 시키지 않더라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 그가 관여하는 일들을 보면 여전히 그가 민간외교의 대표적인 채널로 건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남동 개인사무실에서 손수 차를 끓여주는 그의 모습은 그저 마음씨 좋은 이웃 어르신 같다. “누가 중국에서 사 온 찬데 아주 맛과 향이 아주 좋아”라며 잠시 그윽하게 찻잔을 주시했다. 편안해 보이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눈빛과 미소, 그의 지난 시간이 새삼 궁금해졌다. 
 
한미 양국을 떠들썩하게 한 코리아게이트

1976년 10월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로 소위 ‘코리아게이트’가 일파만파 세상에 퍼졌다. 보도된 내용과 세상에 알려진 팩트로만 치자면 “30대 때부터 현지 정계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쌓은 박동선 씨가 미국과 서울을 오가며 미국의 대한(對韓) 쌀 수출과 한국의 미 의회 로비를 중개했고, 이것이 ‘뇌물로 미국 의원과 공직자를 매수했다’고 보도되면서 외교문제로 비화된 사건”이라는 것이 주요 골자다.
그리고 이 사건을 다루기 위해 1977년 2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한·미 관계 조사권을 위임받은 프레이저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박동선 씨가 주한미군 철수와 대한(對韓) 원조 중단 등 한·미 현안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돈을 뿌린 것으로 보고 관련자들을 청문회에 불러 집중 추궁했다. 박 씨는 78년 2월 상·하원 윤리위원회 비공개 청문회와 4월 의회 공개청문회에서 미 의원들에게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인정하고, 기소는 됐지만 처벌은 받지 않았다. 두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코리아게이트는 3명의 미 민주당 의원만 징계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박동선 회장은 최근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 의회 조사위원회가 나를 희생양으로 몰아가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사건을 통해 한국이 처음으로 미국에 대들었다. 미 의회가 청문회에서 나를 완전히 길들이려고 했는데, 내가 덤벼드니까 언론도 놀랐다. 워터게이터사건 때 특별검사를 지냈던 재워스키 수석조사관은 나에게 집중적으로 질문공세를 폈다. 내가 ‘당신이 지금 영어하는 게 분명한데 난 잘 못 알아듣겠다. 텍사스 악센트 때문인 것 같다’고 하자 당황하더라. 미국은 내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공격 목표였다”라며 또한 “정작 나에게 쌀을 팔아 달라고 먼저 부탁한 것은 미국 의원들이다. 내가 먼저 로비한 적이 없다. 캘리포니아 등 5개 주는 쌀이 항상 200만t이나 남아돌았다. 의원들은 재선을 위해서는 쌀 수출에 힘을 쏟아야 했다. 5개 주 의원들이 뭉쳐 로비단체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코리안 코커스’였다. 이 단체 관련 하원의원이 전체의 약 20%인 86명이나 됐다. 상원의원 10명도 있었다. 이들은 나에게 쌀 10만t만 사주면 코커스 전체가 무엇이든 도와주겠다고 했다”라고 회상했다.
젊은 나이에 그가 얼마나 대담했는지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웬만한 배짱이 아니고서야 당시 미 의회 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당당함이 결국 사건을 일단락 짓는데 큰 역할을 한 셈이다.

“민간외교의 역할, 이는 내가 살아온 삶 그 자체”

16세 때 유학을 가서 30대부터 미국 정재계 인사들과 인연을 맺어 온 그는 자신감 하나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왔다. 1961년 미 상원의원의 소개로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만난 박 회장은 이후 박 대통령의 방미 때 다시 만나 원조에 대해 조언했다고 회상했다.  
그가 당시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박 대통령이 끝까지 자신을 신뢰했고 믿어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가가 자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는 기꺼이 자신을 던져 민간외교의 역할을 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 이후 40여 년이 지나가는 지금.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 명의 민간외교가 이뤄낸 역할이다.
그는 “인맥이 나의 재산이다. 각국 인사들과의 인맥이 아직 우리나라 외교채널의 역할을 하고 있고, 지금은 나와 친구처럼 형제처럼 지내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만든 네트워크는 신뢰가 바탕이 된 오랜 인연이기에 웬만한 일은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된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며 살아있는 정보를 얻기도 하고 그것이 곧 국익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라고 밝혔다. 그가 이뤄낸 수많은 치적을 일일이 밝힐 수는 없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곧 출범하는 ‘지구촌새마을운동본부’ 고문이 되어 고견을 전해달라는 부탁에 박동선 회장은 흔쾌히 수락을 하면서도 충고를 잊지 않았다.
그는 “새마을 운동이 글로벌화되는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우리나라가 그랬듯, 새마을운동은 개발도상국에게 큰 힘이 될 것이고, 그들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공익단체의 성격과 취지를 잘 살려야만 주변에서 곡해하지 않는다. 개인의 사욕을 버리고 진정성으로 국익을 위해 활동한다면 틀림없이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며 경영 구루(guru)로서의 조언을 했다. 그의 말 속에서는 세월과 경험이 녹아 있었다.

차 한 잔 속에 지난 세월의 노고를 털어내다

한국차인(茶人)연합회 이사장이기도 한 박동선 회장은 지난 1977년경 도범 스님의 권유로 차에 입문했다. 최근 ‘한국의 전통 차 확산’ 토론회에서 “미국에서 정치계와 어울릴 당시, 차의 역할이 컸다. 한국전통문화를 알리는데 차가 크게 기여했다”며 “차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일이 훗날 한국의 정신적 단결을 이끄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외국 손님들을 접하는 일이 많은 그는 차를 마시면 더욱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그들은 한국의 차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이러한 박 회장의 지난 시간을 증명하듯, 그는 세계 각국과의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다. 한국은 몰라도 박동선은 알던 시절부터 벗으로 지내는 이들이 이제는 각국 정상의 자리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박 회장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간이 오기까지 그가 겪어낸 질곡의 세월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만은, 그를 날마다 일으켜 세운 원동력은 바로 “국가에 기인한다”는 자부심이었다. 지금도 그는 이를 삶의 최우선 가치로 여기고 있다.
삶에는 항상 사이클과 굴곡이 있다. 어둠을 지나면 새벽이 오듯, 역경을 이겨내면 반듯이 좋은 날이 온다. 살아온 인생의 지혜 혹은 경험이 이를 반증하듯, 쉼없이 달려온 박동선 회장의 오늘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지금도 나 자신보다 국가와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그다. 그래야 불안한 미래가 희망으로 점철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