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기다린 김무성, 이제 그의 시나리오가 시작된다
당심(黨心) 잡은 김무성, 박심(朴心) 잡은 서청원에 큰 차이 승리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친박 좌장 서청원 의원을 제치고 원박(원조친박) 김무성 의원이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새누리당 내부의 체제정리와 함께 2016년에 있을 총선의 공천권을 가져감에 따라 당내 김무성 의원의 파워가 극대화 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무성 의원의 존재감이 박근혜 대통령의 레임덕을 가져오는 것은 아닌지, 친박계의 긴장감은 더해지고 있다.
김무성, 그는 누구인가. 훤칠한 외모에 주변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그리고 친근한 사투리의 김무성 의원. 그는 1951년 9월20일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 화랑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 서울 중동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전남방직과 신한제분을 운영하며 당대 거부 반열에 올랐던 부친 덕분에 그는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중동고 재학시절인 1969년 3선 개헌 반대를 위해 서울시내 고등학교 대표들과 연합시위를 주도, 리더십을 발휘하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1984년 김영삼 대통령의 상도동계와 고 김대중 대통령의 동교동계가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멤버로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발을 내딛었다. 3당 합당 이후, 민자당에서 활동하며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에 일익을 담당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문민정부에서 내무부 차관을 맡기도 했다.
1996년 15대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된 김무성 의원은 16, 17, 18, 19대까지 국회에 진출, 5선의 중진 의원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김 대통령 퇴임 이후 친박 수장으로 활동하며 일명 ‘여왕의 남자’가 된다. 친이계가 활개를 쳤던 2008년에는 소위 공천학살로 인해 무소속으로 출마, “살아서 돌아오라”는 박 대통령의 바람대로 국회의원이 됐고 이후 다시 한나라당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여왕의 남자’가 태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박근혜 대통령과 묘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이후 2010년, 그는 세종시 수정안을 내며 박근혜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걸었고 2년 뒤 제19대 총선에서도 공천 탈락의 수모를 당했다.
당시 그는 고심 끝에 ‘백의종군’을 선택했고 우파 분열을 막아냈다. 김 대표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캠프의 총괄선대본부장으로 귀환했다. 당시 캠프 전체에 금주령을 내리고 야전침대에서 생활하며 분투해 박근혜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승리가 확정된 날 그는 “그간 감사했다”는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여의도를 떠났다. 두 번의 공천 탈락은 그에겐 시련이었지만 그를 거듭나게 한 계기였다. ‘무관’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2013년 4월 재보선 때 그는 부산 영도에서 승리하면서 컴백했고, 1년여 만에 당권까지 꿰차는 기염을 토했다. 소탐대실하지 않는 김무성 의원의 지혜가 오늘날의 당대표를 탄생시켰고 대권주자 1순위에 이름을 올리게 한 것이다.
그렇게 김무성 의원에게 ‘비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어느 순간부터 박 대통령의 레임덕을 재촉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최근 새누리당은 제3차 전당대회를 열고 대표최고위원에 김무성 의원을, 최고위원에 서청원·김태호·이인제·김을동 의원을 선출했다. 이번 전대에서 김 후보는 5만 2,706표를 획득하며 3만 8,293표를 획득한 ‘친박’ 서 후보를 1만 4,413표 차이로 제쳤다. 당초 김 의원과 서청원 의원의 박빙 승부가 될 것이라는 일부 예측과 달리 김 의원의 압도적 표차 승리였다.
‘친박’ 핵심들이 고배를 마시며 일각에선 박근혜 대통령의 일방적인 국정운영 등에 대한 당내 반발이 표로 나타났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 때문에 김 대표가 여권의 역학구도와 국정운영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불러올 전망이다.
전당대회를 관통했던 ‘박근혜 구하기’와 ‘주류 견제론’의 경쟁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게다가 직전 사무총장을 지내며 친박 당권파의 핵심으로 통하는 홍문종 의원마저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세월호 참사와 국무총리 후보자의 연이은 낙마로 타격을 입은 여권의 위기에 당심과 민심의 선택은 ‘순응형’ 지도부가 아닌 할 말은 하는 수평적 당·청 관계를 표방한 지도부 쪽으로 향한 셈이다. 이 밖에 4명의 최고위원에는 7선의 서청원, 재선인 김태호, 6선의 이인제 의원이 득표 순으로 선출됐고, 재선인 김을동 의원은 여성을 선출직 최고위원에 포함하도록 한 규정에 따라 5위 득표자인 홍문종 의원을 탈락시키고 지도부에 입성했다. 김태호 의원이 2만 5,330표를 얻어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였던 3위를 차지했고, 이인제(2만 782표) 홍문종(1만 6,629표) 의원이 차례로 뒤를 따랐다. 김을동 의원은 1만 4,590표로 6위였고, 김상민(3,535표) 박창달(3,293표) 김영우(3,067표) 의원이 하위권에 머물렀다.
이에 따라 그동안 당을 이끌었던 주류 당권파의 활동이 한동안 주춤해지는 반면, 김 대표를 필두로 한 비주류는 활동 반경을 넓혀갈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신임 당 지도부는 역대 재보선 중 규모가 가장 큰 ‘7.30 재보선’에서 원내 과반 의석 붕괴사태를 막는 것이 가장 큰 임무로 대두되었다.
30년 넘는 오랜 정치 경험으로 누구보다 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김 대표가 취임한 지 1년4개월밖에 되지 않은 박 대통령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김 대표는 전당대회 기간 내내 “박근혜 정부의 성공적 국정운영을 돕겠다”고 공언까지 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MB정부 이후 여당 역사에서 가장 장악력이 센 당 대표라는 평가다.게다가 차기 대권 주자군에도 포함되는 김 의원이 ‘미래 권력’으로서 떠오를 경우 ‘현재 권력’인 박 대통령과 굵직한 사안에는 갈등을 빚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로 김 의원은 세월호 참사와 인사 난맥상이 이슈로 부상했을 때 청와대 참모진의 책임을 물으며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주류로는 서청원 의원 외에는 친박 주류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 없다. 여성 몫으로 최고위원이 된 김을동 의원도 친박을 표방했지만 주류와는 거리가 있다. 앞서 2012년 5월 친박 성향의 황우여 의원이 대표로 선출되고, 나머지도 친박의 이혜훈 전 의원, 정우택 유기준 의원이 선출돼 5명 중 4명이 친박이었던 것과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다. 이 과정에서 지도부에 비주류가 대거 입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비주류가 최고위원회에 선출된다고 해도 그리 녹록한 자리만은 아니다. 7.30 재보선과 2016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이 적지 않다. 현재 새누리당의 원내 의석수는 147석. 15석이 걸린 이번 재보선에서 적어도 4군데에서는 승리해야 원내 과반을 사수하게 된다. 하지만 야당의 견제 또한 만만치 않아 그리 쉬운 선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현 지도부가 공천 작업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공식 선거운동에서 김무성 대표가 어느 정도 역량을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앞길이 순탄할지 아닐지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김무성 의원은 전당대회 출마 때부터 “7.14 전당대회에서 1·2위의 표 차이가 적게 나면 당이 혼란을 빚을 수 있기에 압도적 표차로 당선돼 안정적인 당 운영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자신했다. 김 의원은 또 “우선 네거티브 없는 선거, 돈 봉투 없는 선거, 줄 세우기나 세 과시 없는 선거라는 3無 선거의 원칙을 흔들림 없이 실천하겠다”고 밝히면서 “정치 적폐의 청산을 통해 자생력 있는 정당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이날 ▲정치 적폐 청산 ▲정당 민주주의 실현 ▲격차 해소를 약속하며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김무성 의원은 처음 자신했던 대로 박심보다 당심에 호소했고, 서청원 의원에게 1만 표가 넘는 차로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그는 “제 나이로 보나, 당 경력으로 보나, 지난 대선과 그 전 19대 총선 때 당에 끼친 공로로 보나 이번에는 제가 당 대표가 할 때가 됐다고 ‘순리’라고 생각한다”는 자신감 있는 말로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도 했다.
지금 시급한 것은 7.30재보선. 과반수 의석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약 40%의 지지율을 받고 있는 박 대통령의 지원이 필요하다. 이에 김무성 의원은 “재보궐 선거가 끝난 뒤 그동안 말한대로 ‘대탕평인사’를 하도록 하겠다”면서 “물론 이번에 선출된 최고위원 5명과 함께 상의해 결정하도록 하겠다. 그동안 당에서 소외 받았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오랜 기다림이 있었다. 하지만 조급해 하지 않고 결정적 한 수를 노린 것이 통한 것이다. 김무성 의원의 머릿속에는 그 기다림의 시간만큼 많은 시나리오들이 있을 것이고, 이제부터 그가 만드는 영화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