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반도 러시아 귀속 ‘新 냉전 시대’오나
세력 넓히는 러시아-견제하는 서방 전면대립
역사적인 화약고 크림 반도는 북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흑해와 접해 있어 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 전체에 보석 같은 존재다. 러시아가 갈망해 온 얼지 않는 항구로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전쟁을 치른 크림 반도에 다시 긴장감이 돌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국 위기로 촉발된 분쟁이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에 대한 ‘지분’을 주장하는 러시아의 개입으로, 러시아와 서방국가 간의 분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11월21일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유럽연합(EU)과의 통합 협상을 위한 조약과 우크라이나·EU 자유무역협정(FTA) 서명을 무기한 연기하고 러시아에 경제적 의존을 천명했다. 이에 유럽연합과 협력 확대를 기대했던 친서방의 젊은이들이 키예프 거리로 몰려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반정부 시위가 격화됐고 결국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퇴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실각하고 친서방 성향의 야권이 집권하면서 친서방 혹은 친러 정책 노선 선택을 두고 분쟁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는 국토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드네프르 강을 중심으로 친서방 성향의 서부지역과 친러 성향의 동부로 나뉘는데, 동남부 지역에 위치한 크림 반도는 우크라이나 내 친러세력의 중심지라 불릴 만큼 러시아와 밀접하다. 1954년 우크라이나 출신인 니키타 흐루쇼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크림 반도를 소련에서 우크라이나로 편입시켰고, 1992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 분리 독립하면서 자치공화국이 됐다. 전체 인구의 60% 가량인 245만 명이 러시아계로, 그간 크림 자치공화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정부와 크림 자치 의회가 협의해 선출해 왔다. 그러나 크림 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은 절대적이다. 겨울이면 해안 대부분이 얼어붙는 러시아는 크림 반도 세바스토폴에 흑해함대 본부를 두고 군대를 주둔시켜 왔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기 집권기간 동안 최대 국정과제로 과거 소련권의 재통합을 추진하고 있어 서방국가와 러시아간의 분쟁이 계속될 전망이다. 푸틴은 2015년까지 유럽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잇는 ‘유라시아경제연합(EEU)’ 창설을 추진하고 있으며, 옛 소련의 중심국가인 우크라이나를 EEU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압도적 찬성률, 크림 반도 러시아 편입
안드리 데시차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크림자치공화국 러시아 합병 가결에 대해 “모든 선택권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히고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미국, 유럽연합(EU),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등 국제사회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어 러시아가 실제로 전쟁을 시작하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협상 테이블에 앉아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친러 성향 우크라이나 동부, 러시아 귀속 분위기 확산
크림 자치공화국의 러시아 귀속이 현실화되면서 도네츠크, 하리코프 등 친 러시아 성향의 우크라이나 동부로 귀속 분위기가 확산될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친 러시아 세력이 우세한 우크라이나 남동부 도네츠크, 하리코프에서는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에 대한 반대 시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15일 도네츠크 내 레닌 광장에서 수천 명이 참가한 대규모 러시아지지 집회가 열렸다. 당시 집회에는 우크라이나 국기는 보이지 않고 러시아 국기와 아르헨티나 마르크스주의자 체 게바라의 사진을 새긴 붉은 깃발만 펄럭였다.
도네츠크에는 러시아계 주민이 48%,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46%를 차지하지만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보다 러시아와 유대관계가 깊다.
이 지역에서는 크림 반도 주민투표가 열리기 3일 전 친 러시아 시위대와 친 중앙정부 시위대 간의 충돌이 발생해 우크라이나 중앙정부를 지지하던 22살의 남성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이후 중앙정부 지지자들이 공포에 휩싸여 시위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코솔라포프 우크라이나 공산당 현지 대표는 “우크라이나 동부 주민은 러시아 귀속을 지지한다”며 “중앙정부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중앙정부를 합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도네츠크 중앙정부지지 시위는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러시아 지지자들이 레닌광장에 자리를 잡고 자경단을 모집해 러시아 귀속 탄원서에 서명을 받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이 국경에 주둔 군대를 늘리고 있어 계속되는 갈등이 결국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미국·EU’ VS ‘러시아’…신냉전 시대 오나
17일 투표결과가 발표되자 미국과 EU는 기다렸다는 듯 이번 투표가 우크라이나법과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입을 모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크림 주민투표는 우크라이나 헌법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미국과 국제사회는 투표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압박했다.
백악관 측은 “러시아가 크림반도에서 물러서지 않을 경우 러시아 경제에 타격을 주고 국제사회에의 영향력을 줄이는 등 제재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국제사회는 위험하고 안정을 해치는 러시아의 행동을 규탄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하고, 우크라이나 국민과 영토보전, 주권을 지지할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우선 행정명령을 통해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드미트리 로고진 러시아 부총리를 포함한 러시아 관리 7명과 우크라이나 관리 4명에 대한 제재를 내렸다. 미 정부는 이들이 우크라이나 주권과 영토를 위협한 책임이 있다고 보고 여행금지와 자산동결 조치했다.
미국의 우방인 EU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 EU는 17일 크림반도의 우크라이나 분리 탈퇴와 러시아 편입 추진과 관련이 있는 21명에 대해 여행금지 및 자산 동결 조치를 취했다. 유럽연합 외무장관들은 브뤼셀에서 회동해 크림 반도의 주민투표 및 의회의 독립국 선언에 대한 조치로 이같이 결정했으며 만일 러시아가 위기 종식을 위한 협상에 신속히 나오지 않을 경우 추가 제재가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한편 영국은 오는 6월 러시아 소치에서 열릴 예정인 G8 회의를 취소하고 런던에서 회의를 주최하겠다고 제안했으며 독일 정부는 4월에 예정된 독일-러시아 정부 간 경제회담을 취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독일 슈퍼겔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가 크림반도 무력 점거 상황을 풀지 않으면 러시아를 G8, 주요 8개국 회원국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미국과 독일, 일본 등 다른 7개국에서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러시아 경제적 제재’ 부담
러시아를 금융 부문에서 고립시키려면 유럽연합의 협력이 필요한데,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EU와 러시아의 통상 규모가 연간 4,600억 달러에 달하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적 제재는 EU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 제재가 효력을 보려면 EU와 미국의 공조가 필수적인 요소지만 현재 EU에 있어서 러시아는 3위 규모의 교역국인데다 전체 천연가스 사용량의 3분의 1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경제가 불황에서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고 있는 유럽으로서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 투자자들은 유럽에 수십억 달러의 자산을 유치해 놓고 있다.
크림 자치공화국 합병은 러시아에게도 부담이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중앙정부가 지던 재정적 부담을 져야하는데 크림 자치공화국은 전체 예산의 70%, 수도 공급의 90%와 에너지 및 식량 공급 대부분을 우크라이나에 의존하고 있다.
유럽외교협회의 카드리 릭 선임연구원은 “현재 유럽의 입장은 뒤죽박죽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아무런 합의가 없다”고 지적한 바 있으며, 드미트리 트레닌 모스크바 카네기 센터 소장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러시아가 미국과 EU 연합에 맞서며 앞으로 계속 동유럽에서 갈등을 빚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위기의 우크라이나,
국제 원조 30억 달러, 러시아로 흘러들어갈 듯
우크라이나는 지난 수년간 경제 성장 둔화와 지속적인 경제난에 시달렸다. 지난해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 GDP의 5%까지 불어나자 유럽연합과의 협력 협정을 통해 EU 경제권으로 편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무역 보복 등 경제적 압박을 가해 EU 경제권으로 편입이 무산되자 정권 붕괴에 이르는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계속된 정치 불안으로 결국 국가 신용등급이 디폴트에 가깝게 수직 하락했다.
WSJ에 따르면 세계은행은 우크라이나에 30억 달러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세계은행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진행 중인 인프라 개발 및 민간 부문 프로그램 등에 20억 달러를 나머지 10억 달러는 정부 예산안을 위해 지원하며, 이번 지원은 세계은행 위원회가 결정을 승인하면 연말까지 자금이 제공된다. 서방국가들도 궁지에 몰린 우크라이나에 구제 금융을 지원하기 위해 나서고 있는 가운데, 지원 금액 중 30억 달러에 달하는 액수가 러시아에 흘러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12월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15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러시아가 2014년까지 우크라이나의 채권을 사들인다는 내용 외에 세부 사안은 공개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1차로 작년 12월24일 30억 달러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채권을 샀지만, 이후 2월 말로 예정됐던 2차 매입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쫓겨나면서 중단됐다.
러시아가 1차로 사들인 우크라이나 채권 30억 달러는 5%의 낮은 금리로 발행됐다. 이자는 6월 20일과 12월 20일 등 1년에 두 번 나눠 지급하기로 되어있으며 만기는 내년 12월 20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IMF나 서방으로부터 지원이 이뤄지는 순간, 러시아가 채권 환급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결정적인 조건이 붙어있다. 양국이 맺은 합의 내용에 따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지원금 가운데 러시아가 매입한 30억 달러의 채권액은 법적으로 그 즉시 러시아에 귀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