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경쟁시대

2006-09-26     글/ 김용우 부장
디자인!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아라
가전, 첨단제품 디자인 승부수 띄워, 국제시장 잡기 총력
전자업체들이 소비자들의 눈 맛 잡기에 나섰다. 기능 면에서 업체 간 차별이 줄어들면서 독특하면서도 수준 높은 디자인으로 승부수를 걸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 LG전자 등은 신제품 출시 때마다 자사 제품의 차별화된 디자인을 적극 강조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과 구본무 회장 등 그룹 총수 역시 ‘고객이 감동하는 디자인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주문을 내놓고 있다.

국내 전자업계가 앞 다퉈 ‘디자인 우선 경영’을 선포하고 있다. ‘가려졌던 얼굴’이 뜨는가 하면, ‘디자이너 얼굴 숨기기’를 지시하는 곳이 있는 등 업계 디자인 경쟁이 뜨거워지면서 흥미 있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LG전자 김쌍수 부회장은 지난 4월 서울 역삼동 ‘디자인경영센터 LSR연구소’를 찾았다. 김 부회장은 이날 이례적으로 연구소장뿐 아니라 연구원들까지 만나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를 받고 격려해 화제가 됐다. 아이디어를 주로 내는 연구원들의 경우 개별 디자인 제품이 없어서인지 그동안 CEO가 방문하더라도 연구소장이 대표로 브리핑하는 것이 관례였다.
LG전자가 올해를 디자인 우선 경영과 함께 블루오션 경영 원년으로 선포하면서 LSR연구소는 주목받기 시작했다. LG전자뿐 아니라 계열사 임직원들의 발길이 유난히 잦아졌다. LSR연구소 관계자는 “선진국 성공 모델을 따라하면 되는 ‘미투(me too) 시대’는 지났다”며 “이제는 글로벌 리더 위치에 선 만큼 스스로 성공 모델을 찾아야 하고, 그 답은 고객으로부터 나온다”며 뜨는 배경을 설명했다. ‘Life and Soft Research’ 의 이니셜에서 딴 이름처럼 이 연구소는 고객의 ‘디지털 라이프스타일’을 파고들어 제품 수요를 찾아내고 이를 기술개발진과 경영진에 전달하는 것이 임무.
히트작도 많이 냈다. 자동 녹화 기능이 있는 타임머신 TV는 ‘원할 때 TV 방송을 잠깐 멈출 수 없을까’, ‘상냉장,하냉동 구조’의 신개념 냉장고 ‘프렌치 디오스’는 ‘자주 쓰는 냉장실을 눈높이에 맞춰 윗부분에 둘 수 없을까’ 등의 철저한 고객 수요 분석을 통해 만들어낸 성공작이다.
삼성전자는 디자이너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쪽으로 최근 방침을 바꿨다. 삼성 휴대전화 사상 최대 히트작인 스킨폰 디자인 책임자는 인터뷰 조건역시 매우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블루블랙폰 디자이너들이 매스컴을 탄 뒤 스카우트 제의 후유증을 심하게 앓아서다.
‘피부처럼 얇은 폰’이라는 뜻의 스킨폰은 지난 5월 중순 출시돼 한 달 만에 10만대가 팔려 ‘최단기간 최대 판매’의 기록을 세웠다. 디자인1그룹 A책임(과차장급)은 “삼성이 기술 지향으로 가다보니 감성을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며 성공 배경을 설명했다.
감성적 디자인을 살리려다 개발팀과의 충돌도 잦았다고 한다. 스킨폰의 ‘창백한 화이트’ 색상은 숫자 등을 새길 때 레이저가 색상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고, 스킨폰에 남성미를 보강해 준 금속 프레임은 “내부의 ‘인테나’와 금속은 상극이어서 안 된다”는 개발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디자인팀의 고집으로 기술 개발이 이뤄졌다.
A책임은 “IT산업은 한두 명의 아이디어가 성공을 낳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사실은 이처럼 조직력과 팀워크가 낳은 산물”이라고 공을 팀에 돌렸다.

가전제품 디자인 경쟁도 치열
올 상반기 삼성전자 디자인그룹실에서는 패션디자이너 앙드레김과 삼성전자 디자이너들과의 만남이 잦았다. 이 자리에서 삼성전자 생활가전 디자인을 맡은 앙드레김은 디자이너들에게 다양한 패턴을 하나씩 선보이고 있으며, 디자이너들은 이를 생활가전에 접목할 방법을 놓고 심도 있게 논의한다.
LG전자는 영국의 세계적인 홈인테리어 디자이너인 ‘트리샤 길드(Tricia Guild)’가 디자인한 ‘스팀 트롬 스페셜 에디션’을 영국 시장에 내놨다. 세탁기에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적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LG전자는 이 제품을 영국 세탁기시장 최고가인 1499파운드(약 266만원)에 헤롯백화점과 존루이스백화점 등 최고급 백화점에서만 모델별 100대씩 한정판매할 예정이다.
LG전자는 올해부터 디자인(Design)과 예술(Art)을 결합시켜서 만든 ‘디자이나트(Designart)’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LG전자 제품의 콘셉트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딱딱한 기존 디자인을 탈피해 모니터 스탠드 부분을 도자기ㆍ월식 등 조형적 디자인으로 만든 ‘판타지 LCD모니터’는 LG전자의 야심작으로, 출시되자마자 소비자들의 눈 맛을 사로잡고 있다. LG전자 디자인연구소 관계자는 “모니터는 디지털제품 중 TV보다 더 많이 접하게 되는 제품”이라면서 “감성 디자인제품을 통해 디지털제품들이 실내디지털 조형물로서 기능을 하는 ‘디지털 갤러리화’의 서막을 열었다”라고 말했다.
LG전자는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인 ‘몰리네리’를 비롯한 전 세계 유명 디자이너 10여명과 네트워크를 형성, 디자인 관련 협의를 꾸준히 해오고 있기도 하다.
삼성전자는 최근 차세대 밀리언셀러(100만대 이상 판매되는 제품)로 키우고 있는 디지털TV인 ‘보르도 TV’를 이름 그대로 포도주가 담긴 와인잔의 형상으로 고급스럽게 디자인했다.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등 생활가전 쪽에서 앙드레김과 제휴해 디자인 개발에 들어갔으며, 세계적인 가구 및 주방용품 디자이너 제스퍼 모리슨에게도 휴대폰 디자인 개발을 의뢰해 놨다. 특히 휴대폰 쪽에는 나비와 장미 문양 등 안나수이 특유의 디자인 콘셉트를 담은 ‘안나수이폰’, 미국 유명 패션디자이너인 ‘벳시존슨폰’, 세계적인 오디오 전문업체인 뱅앤올룹슨과 제휴한 ‘세린’ 등의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삼성전자 생활가전총괄 디자인그룹 상무는 “이제 가격으로 경쟁하는 시대는 지났다”라면서 “생활가전은 물론 다른 전자제품들도 기능적 차별화가 어려워진 만큼 고급스러운 디자인 개발을 통해 상징적 가치를 높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제시장도 디자인이 승부
한편 일본 전자업체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2000년대 들어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한국 기업에 ‘전자왕국의 맏형’의 위상을 무참히 짓밟혔던 일본 전자업체들이 이제 칼날을 갈고 반격에 나서고 있다. 왕년의 ‘가전 황제’ 소니가 공식적으로 가전 명가 부활을 선언한 가운데 파나소닉 브랜드로 유명한 마쓰시타, LCD-TV의 최강자 샤프, 전통의 히타치와 미쓰비시 등도 지난 몇 년간의 설움을 털고 명성 찾기에 올인 했다.
‘디지털 가전’의 신화를 새로 쓰며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인 미주 시장에서 눈부신 선전을 펼친 한국 업체들이 부활한 일본 전자회사들과 벌이는 제2라운드는 그야말로 전쟁터로 표현할 수 있다.
소니와 파나소닉의 가격할인 공세에 시달리던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부터 가만히 당할 수는 없다는 각오 아래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다. 그것은 바로 ‘디자인’이다.
디자인 공세의 최전선에는 삼성의 야심작 ‘보르도’ LCD TV가 자리하고 있다. 삼성은 지난해 4분기 삼성을 밀어내고 세계 TV 시장 1위에 오른 소니에 대한 대반격을 위해 크리스탈 와인 잔에 포도주가 조금 남은 모습을 형상화한 보르도 TV를 출시했다. 삼성의 보르도 TV는 현재 북미 시장에서 소니의 브라비아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북미 시장에서 지난 3월 출시된 보르도는 불과 3개월 만에 10만대가 팔렸고 삼성의 점유율 확대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NPD에 따르면 5월 말 현재 미국 디지털TV 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23.9%의 점유율로 17.7%를 기록한 소니를 앞질렀다. 삼성이 북미에서 디지털 TV 사업을 시작한 이후 소니를 제치고 1위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브라비아와 혈투를 벌이고 있는 LCD TV 시장에서도 점점 세를 넓혀가고 있다. 5월 한 달간 소니는 미국 LCD TV 시장의 14.5%를 점유했고, 삼성은 14.1%로 불과 0.4%포인트만 뒤졌을 뿐이다. 삼성과 소니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LCD TV의 명가 샤프의 5월 점유율은 12.4%로 하락했다.
삼성전자 북미법인 마케팅 담당자는 “LCD TV의 가격인하로 소비자들의 수요가 늘고 있어 6월 달에는 소니를 제치고 LCD TV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보르도 TV 이전에도 디자인을 차별화한 제품으로 톡톡히 재미를 봤다. 삼성이 지난해 2월 출시해 단일 제품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100만대가 팔린 밀리언 셀러 ‘로마’는 직사격형 외관이 대세인 디지털TV 시장에서 아랫선을 V라인으로 파내는 오각형 디자인을 과감히 도입한 제품. ‘로마’ 브랜드는 외관이 다소 밋밋한 다른 제품과의 뚜렷한 시각적 차별화를 바탕으로 소비자들의 높은 호응을 얻었고, 삼성전자가 유럽 TV 시장에서 1위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디자인에 대한 삼성전자의 이 같은 집착은 사실 뼈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글로벌 전자 기업으로 도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소니의 워크맨, 애플의 아이팟, 모토로라의 레이저처럼 한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는 디자인을 갖춘 제품을 내놓지 못했다.
특히 모토로라의 레이저가 결정타였다. 불과 2~3년 전 삼성과 LG 등 많은 한국 휴대폰 업체들은 카메라폰 화소 경쟁에 열을 올리며 기술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화소 경쟁을 철저히 외면하던 모토로라는 2004년 7월 면도날처럼 얇은 레이저 폰을 내놨다.
화소 경쟁으로 뚱뚱해진 한국 휴대폰은 날씬한 레이저와 도무지 경쟁할 수가 없었다. 한국 휴대폰 업체들은 모토로라의 돌풍을 멀거니 지켜보는 처지로 몰렸다. 레이저 이전에는 금방이라도 모토로라를 누르고 세계 2위 휴대폰 업체가 될 것 같았던 삼성은 이제 2위는 켜녕 모토로라와의 격차를 줄이지 못해 고심하고 있다. 디자인 경쟁은 젊은 소비 계층을 끌어당기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미국 최대 전자제품 판매점인 베스트바이에서 만난 25살의 조 포스터는 ‘디자인’이 제품 구입의 첫 번째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2년 전 소니 TV를 샀다가 디자인이 별로여서 삼성 제품으로 바꿨다”며 어느 회사에 관계없이 디자인이 우수한 제품이 최고라고 강조했다.
포스터는 중년의 미국인처럼 소니 브랜드에 대한 특별한 애착도 없었다. 파나소닉이 어느 나라 브랜드냐고 기자에게 되물을 정도로 브랜드나 기업의 국적 자체에 무심했다. 마찬가지로 삼성이 한국 브랜드인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 젊은 소비층을 공략하기 위해 한국 업체들이 가장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디자이너 앞세운 명품가전도 선보여
삼성전자가 앙드레김과 손잡고 가전제품의 프리미엄 이미지를 강화키로 한 것을 겨냥해 LG전자가 이노디자인의 ‘김영세 카드’로 맞불작전을 벌인다. 특히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각각 앙드레김과 김영세 사장이 디자인한 제품을 이르면 이 달 말 선보일 예정이어서 하반기 가전업계 화두는 ‘디자인 경쟁’으로 모일 전망이다.
업계에 따르면 LG전자는 올 초 김영세 이노디자인 사장에게 생활가전 제품 디자인을 의뢰, 이달 말 시안이 나올 것으로 알려졌다.
김 사장은 ‘프리즘’ MP3플레이어 디자인으로 ‘레인콤 신화’를 만든 주역. 업계 관계자는 “올 초 이노디자인에 디자인을 의뢰했다”며 “생활가전 제품으로서 혁신적인 디자인 컨셉트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관계자는 “하반기 출시될 제품이 김치냉장고·냉장고·세탁기인만큼 이 중 하나가 되지 않겠느냐”며 “앙드레김만큼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과감하고 혁신적이라는 면에서는 김 사장이 한 수 위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삼성전자도 지난 8월 중으로 앙드레김이 디자인한 김치냉장고·냉장고·세탁기를 선보였다. 지난 4월 앙드레김과 디자인협력협정을 체결한 이후 4개월 만으로 시제품에 대한 삼성전자 내부 평가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것으로 전해졌다.
제품을 생산하는 삼성광주공장 관계자들도 “예술작품”이라고 입을 모으는 한편, “냉장고는 3도 인쇄가 일반적이지만, 앙드레김 디자인은 6도 인쇄일 정도로 색상이 화려하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