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나무가 있는 청주시 귀래리의 단재기념관
신채호,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시사매거진246호=오경근 칼럼니스트) 역사를 바로 알아야 올바른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뜻의 명언을 남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걸출한 인물이다. 국권 상실이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그는 언론인으로서, 역사가로서, 독립운동가로서 또한 탁월한 문학인으로서 1인 4역을 감당하며 한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민족만을 위하여 천재적 재능을 쏟아낸 인물이다.
역사적인 청주 상당산성 & 친환경적 ‘고드미 정보화마을’
속리산국립공원이 발원한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선면 귀래동은, ‘고드미 정보화마을’로 명성이 높다. 오리농법으로 친환경 농사를 짓는 것 외에 근처에 좌구산 자연휴양림과 미동산수목원, 욕화자연휴양림이 있어 찾는 이들이 많다.
또한 백제시대 토성을 쌓고 방비하던 청주 상단산성은 1716년 조선 숙종이 석성으로 개축해 아름다움을 보존하고 있다. 대체로 성벽의 안쪽에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채우고 다지는 공법을 사용해 자연친화적이라는 것이 자랑이다.
그곳에서 자동차로 한 바퀴 감고 휘돌아 신채호 선생의 생가와 유적지가 있는 ‘고드미마을’로 내려가면 역시 흙으로 벽면을 바른 50여 채의 가옥들이 눈에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들판에 매어놓은 검은 흑염소와 사람 키를 훌쩍 넘어 빽빽이 자란 옥수수, 그리고 무성하게 이파리를 돋은 넓적한 연잎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신선한 자연의 생명력을 부여한다.
귀래동 고드미마을. 유적지 입구엔 ‘조선 광해군 때 신요라는 분이 곧은 말로 상소하여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리어 이곳으로 들어와 숨어 살았습니다. 인조가 반정하여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마을을 곧으미, 고디미, 고드미, 또는 귀래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라고 적힌 안내 표지판이 있다.
바로 이곳에 그 유명한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기념관이 있다. 본래 그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일곱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여덟 살 되던 해에 청주시 상당구 낭선면 귀래리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아홉 살 무렵에 한학자인 조부와 생활하며 <자치통감>을 뗐다. 그 책거리 기념으로 단재의 조부가 1888년에 모과나무를 심었다. 현재는 단재의 묘소 우측 뒤편으로 10m 높이의 거대한 모과나무가 있다.
고드미마을의 단재기념관, 단재 선생과 부인 동상
신채호 선생의 ‘단재’라는 호는 조선 말기 정몽주의 ‘일편단심가’에서 비롯된 일편단심, 단생, 단재라는 뜻이 들어 있다. 오로지 조국만을 사랑하겠다는 그의 의지의 발로다. 그런 신채호 선생을 기리는 <단재기념관>에는 단재 신채호 부부 동상이 있다. 결혼 후 생계와 아이의 양육을 책임지며 신채호 선생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부인 박자혜 선생은 간호사 출신이며 여성 독립운동가 중 하나다.
또한 왼쪽으로 들어서면 50m가량 떨어진 곳에 사당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무국적으로 살다가 2009년에 와서야 국적이 복권된 단재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정면 3칸 맞배집 가운데에 영정이 보존돼 있다. 또한 그 곁에 일명 ‘천고송(天鼓頌)’이라 불리는 ‘하늘북’ 시비가 세워져 있다.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사람을 / 그는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 / 슬픈 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 / 이천만 동포를 불러일으키나니 / 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 하고 / 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 / 섬 오랑캐의 피를 싸그리 긁어모아 / 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하리라’
이를 통해 피눈물 나는, 골수에 사무치는 애국애족과 독립의지를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념관 안에는 1901년 일본의 조선 침략책동 후 안창호, 이갑, 이종호 선생 등과 함께 압록강을 넘으며 읊은 ‘한나라 생각’이란 시가 패널로 전시돼 있다. ‘나는 네 사랑 / 너는 내 사랑 / 두 사랑 사이 칼로 썩 베면 /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 줄줄 흘러내려 오리니 / 한 주먹 덥썩 그 피를 쥐어 / 한 나라 땅에 고루 뿌리리 /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 봄맞이 하리.’ 단재의 참으로 애절하기 그지없는 마음이 느껴진다.
민족 영웅전과 논문 발표로 민족의지 고취한 신채호 선생의 생애
1898년 19세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어 1905년에는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06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함양에 힘썼다.
1907년에는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 등에 가입해 참가했으며 이듬해엔 순한글 <가정잡지>를 편집, 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보> 또는 <기호흥학화보>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일진회 성토에 앞장섰다.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칭다오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안창호 선생과 이갑 선생을 만나 같이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에서 활동했다. 1914년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등 한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였다. 이어 1915년에는 베이징에 체류하며 <조선상고사>집필했다. 이어 상하이로 건너간 단재 신채호 선생은 신규식 과 신한청년회 조직하고 참가했으며 박달학원 설립과 운영을 도왔다.
‘칼보다 강한 펜의 힘’으로 독립운동 주창하던 단재 선생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는 한성임정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맞서는 포부도 보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 신대한청년동맹 부단주 등에 피선되었다. 무엇보다 1922년 의열단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었으며 임시정부 창조파의 주동역할을 감당했다.
단재 선생은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가 다물단을 조직하고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한 그는 1927년 신간회 발기인이 되었으며 동시에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했다.
그리고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 항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36년 옥사했다.
그의 일생은 오늘날 민족의 앞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갈 길을 열어주었다. 자주와 평화 통일의 실현이라는 민족적 과제가 산적해 있는 이즈음,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절실한 교훈을 남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