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판, 대선 개입 의도 없어… 1심 무죄

권은희 수서서 전 수사과장 증언 전부 거짓? 검찰, 여당 실세 통화 내역 안 밝혀

2014-03-04     신현희 차장

경찰은 대선 직전인 2012년 12월16일 오후 11시쯤 ‘국정원 여직원이 대선에 개입했다는 혐의가 없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굳이 밤 11시에 이 같은 보도자료를 발표했어야 했는지 의문을 남긴 가운데, 이를 진두지휘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 1심 무죄가 선고되었다.

김 전 청장 무죄, 보도자료 시점 전혀 문제없다?
김용판 전 청장은 국정원 정치·선거개입 사건의 경찰 수사를 의도적으로 은폐·축소한 혐의로 기소됐었다. 재판부는 단지 “보도자료의 배포시점이 최선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남는다”라고 밝히며 1심 무죄를 선고했다. 그의 무죄는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배포시점이 ‘아주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법조계에선 이번 사건같이 정치·사회적 파장이 큰 판결에선 유·무죄 결론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증거부족 등으로 무죄를 선고하더라도 판결문을 통해 ‘사회적 경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 재판부가 허위로 드러난 중간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아쉽다”면서도 발표 내용이 사실에 부합했는지 등은 너무 쉽게 판단을 회피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 변호사는 “판결의 완결성 부분에서 아쉬운 것은 사실”이라며 “대선에 미친 영향 등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적정 수준에서 정리를 해주는 것이 필요했다”고 밝혔다.
김 전 청장을 기소한 검사들에 대한 논란도 없지 않다. 권은희 과장과 검사들의 정치적 성향이 도마 위에 오른 것. 과연 재판부가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사건으로 국정원 선거개입의 전말을 밝힐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재판부의 독립과 중립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기계적 접근, 이미 답 나온 수사 아니었나
경찰은 지난 2012년 대선 사흘 전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할 당시 김하영 씨의 인터넷 활동에서 문제되는 사항을 포착했다. 김 씨가 ‘대선에서 문재인이 당선될 수 없는 이유’에 찬성 클릭을 하고, ‘저는 이번에 박근혜 찍습니다’라는 글을 열람한 사실 등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문제가 된 글은 2~3건에 불과했다. 일부 글을 삭제한 흔적도 발견했으나 일반적인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후 검찰 수사에서 주기적으로 작성 글을 삭제하라는 국정원 지침이 확인됐으나, 재판부는 “삭제 글 등이 별거 아니었다”는 경찰 측 주장을 인정했다.
더구나 김 씨가 컴퓨터를 임의 제출하면서 “문재인·박근혜 후보의 비방·지지글만 확인하라”고 요구한 것을 빌미로 경찰이 중간수사결과 당시 이 부분만 확인한 것처럼 “혐의없다”고 발표한 것도 정당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하지만 김 씨가 대선개입 활동을 했다는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서는 김 씨의 노트북뿐 아니라 인터넷 등에 남아 있는 게시글·댓글을 확인하는 게 상식이다. 검찰은 “게시글·댓글은 하드디스크에서 찾을 수 없고 인터넷 등 사이버 수사로 확인해야 하는 영역인데, 하드디스크만으로 범위를 한정하고는 게시글·댓글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한 것은 앞뒤가 안 맞고 터무니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수사상 필요하다면 김 씨가 임의 제출한 노트북을 다시 압수수색해서라도 필요한 내용을 찾아내야 했는데 서울경찰청이 이런 노력을 전혀 안 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수서경찰서 수사팀은 이후 아이디·닉네임을 넘겨받은 지 하루 만에 구글링을 통해 자료를 확보하고, 이틀 뒤엔 포털 서버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수사에 나섰다. 재판부 판단과 달리, 경찰이 아이디 등을 근거로 강제수사를 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다만 피의자가 임의제출한 압수물의 분석 범위를 지정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현행법 규정도, 대법원 판례도 없어 이를 용인한 판결에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긴 어렵다는 게 상당수 법조인들의 견해다. 다만 일부 판사들은 “무죄를 위해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접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경찰, 국정원, 정치권, 관계 포착했으나 직접적 증거 없어
검찰은 김 전 청장을 기소하면서 이번 사건을 김 전 청장의 ‘자발적 충성’에 의한 단독 범행으로 결론 내렸다. 김 전 청장의 수사과정에서 외압을 넣었다는 권은희 수사과장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기 때문에 무죄라는 것이다.
검찰도 수사 초기에는 김 전 청장의 범행 동기, 즉 배후 세력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검찰은 사건이 최초 발생한 2012년 12월11일부터 경찰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가 있은 16일까지 경찰, 국정원 및 정치권 관계자의 통화 내역을 살펴봤다. 이를 통해 이 기간 동안 3자 간의 통화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김 전 청장의 범행 동기를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통화한 사람과 통화한 시간은 알 수 있지만 통화 내용까지는 알 수 없다. 통화한 사실만으로는 국정원이나 정치 관계자가 김 전 청장의 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검찰은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어차피 이 사건을 김 전 청장의 단독 범행으로 규정하고, 배후 세력보다는 김 전 청장의 유죄 입증 여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 앞두고 여야의 기싸움으로 번져
이번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에 대해 야당은 특검을 촉구하고 나섰고, 여당은 “특검 주장은 제2의 대선 불복”이라며 수용 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검찰이다. 검찰은 “검사의 명예를 걸고 재판에 임하라”는 김진태 검찰총장의 불호령이 있은 후 즉각 항소했지만, 부실 수사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또다시 ‘정치검찰’ 논란에 휩싸였다.
이처럼 여야가 다시 극한 대치 조짐을 보이는 배경에는 얼마 남지 않은 6·4 지방선거에 대한 기싸움의 성격이 적지 않다. 예비후보 등록개시로 선거전의 서막이 오른 만큼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하고 선거 이슈를 주도해 민심을 움직이려는 것이다.
특히 새 정부 출범부터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온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은 여야 모두 당의 명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선거 기간 내내 이를 둘러싼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계속될 전망이다.
양자 구도의 혜택을 누려온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구조가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일각에서 나온다. 기존 여야 정당이 대치하는 구도를 이어간다면 신생 세력인 무소속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추진위원회’의 활동 공간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반면 다른 시각에서는 여야가 해답을 도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정쟁을 계속 이어갈 경우 ‘새로운 정치’를 내세운 새정추가 반사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렇듯 정치권의 기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검찰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보강수사가 가능할지 여전히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