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최고의 명품 'Big Day'를 기다리며

마에스트로 정명훈 X 국민의 오케스트라 KBS교향악단(프로그램북 8월호 참조)

2018-09-11     강창호 기자

(시사매거진245호=강창호 기자) ‘살바토르 문디’ 4억 5030만 달러(약 5천억 원)에 낙찰! 바로 작년 2017년 11월 해외 수퍼리치들의 뉴욕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라틴어로 ‘구원자’, 즉, 예수를 뜻하는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으로 ‘남자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희귀작이다. 이 작품은 한동안 세계 1위를 차지했던 폴 세잔느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을 앞질러 세계 경매가 1위를 차지했다. ‘살바토르 문디’는 16세기 무렵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로부터 제작 의뢰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200여 년의 세월이 지나 2013년경 러시아인 컬렉터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가 1억 2700백만 달러에 구입 후 개인 소장하다가 작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문화관광부로 넘겨졌다. 현재 이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의 첫 해외 분관인 ‘루브르 아부다비’에 전시되어있다.

예부터 미술품 경매 시장은 전 세계 수퍼리치들의 놀이터였다. 그들이 사고파는 미술품 가격대를 보면 그야말로 고공행진, 으악! 소리가 절로 난다. 또한 그들의 삶의 방식 또한 일반인의상식을 넘어선 상상 그 너머의 세계에 있다. ‘뱁새가 황새 쫓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옛 속담처럼 그들의 명품적 삶은 흉내조차 불가능하다. 그들이 평소 즐겨 쓴다는 명품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백화점 명품관의 그것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명품’은 전 세계 단 몇 개 밖에 없는 희귀한, 오래전 드라마의 유행어 '한 땀 한 땀' 즉 희소가치가 매우 높은 것들이다. 그러기에 ‘살바토르 문디’, 5,000억 원이 그들의 삶에서 통용되고 이해되는 것이다.

1000억 명품? 오케스트라에 관한 발칙한 상상

여기에 음악적 명품은 무엇일까? 무엇이 명품으로 보이고 들리게 하는 것일까? 곡 하나가 과연 ‘살바토르 문디’ 같은 그 만한 가치로 거래될 수 있을까? 그야 개인적인 상황에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소리의 예술’이라는 음악은 왜 미술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만한 가치로 거래되지 않을까? 혹시 만일 베토벤의 제10번 교향곡이라는 게 있어서 극적으로 스코어가 발견된다면, 과연... 그에 대한 가치는? 등등 이런저런 궁금증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본다. 분명한 건 아직까지 악보가 미술품처럼 그렇게 거래됐다고 들어본 적이 없다. 분명 바흐, 헨델, 모차르트 등 음악사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희귀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음악의 경우 미술과 달리 서로의 가치 기준이 다르고 시장성에 있어서 수요와 공급의 출발부터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좀 벗어나서 한 가지 그럴듯한 흥미로운 생각은 해볼 수 있겠다. 클래식 악기 연주자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입단하기까지 그들에게 들어간 비용이 궁금해진다. 과연 얼마나 될까?아마도 어림잡아 입단하기까지의 수학 비용을 평균 10억 원(악기 비용 제외)으로 추정한다면 오케스트라 인원이 보통 100여 명, 그렇다면 단순 산술적으로도 1000억 원가량 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오케스트라 연주 1회의 잠재적 가치는 약 1000억 원! 이쯤 되면 ‘살바토르 문디’(?) 전혀 부럽지 않다.

그렇다면 한 해 동안 KBS교향악단은 몇 번이나 연주할까? 

베토벤과 브람스, 고통 속에 탄생한 명품 컷

‘악성(樂聖)’이라 불리는 베토벤, 57년을 살다 간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 명품적인 베스트 컷은 아마도 그의 마지막 교향곡 제9번 ‘합창’의 초연일 것이다. 마지막 음이 사라지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함. 그 속에 묵묵히 서 있는 베토벤. 무음의 공간 속에 머뭇거리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청중들의 박수갈채와 환호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한 알토 파트의 카롤리네 웅거. 이 모든 게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음악이 성공했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귀머거리 작곡가의 비통함을 넘어 신기를 넘어선 그의 작품이 이미 신과 소통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교향곡 제9번 ‘합창’의 초연(1824년 5월 7일, 오스트리아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은 이 곡을 쓸 당시 이미 베토벤의 귀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외부의 소리조차 전혀 들을 수 없었던 베토벤의 고통이 어떠할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울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작곡을 완성해 나갔다. 당일 초연은 베토벤을 대신해 케른트너토어 극장의 카펠마이스터인 미하일 움라우프가 지휘봉을 잡았고 악장인 이그나츠 슈판치히가 단원들과 눈빛을 교환하면서 호흡을 맞춰갔다고 전한다.

베토벤은 이 곡을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처럼 단숨에 써 내려간 곡이 아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다양하고 수많은 명곡들을 남겼지만 그때마다 늘 자신을 쥐어짜듯 항상 많은 생각과 고통 가운데서 음표 하나하나 골라가며 곡들을 완성해 갔다. 이 작품 또한 첫 구상에서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를 사용한 노래의 선율이 1798년에 스케치 악보가 완성되었지만, 교향곡은 26년이 지난 1824년에 제9번 ‘합창’의 4악장에 사용되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베토벤의 명품적인 음악과 판타스틱 한 기념비적인 드라마는 그의 오랜 시간과 고통 속에서 비로소 탄생했다.

브람스는 어떠한가? 역사가들은 바흐, 베토벤, 브람스를 가르쳐 ‘3B’라고 닉네임을 붙였다. 음악사의 큰 스승들과 함께한 브람스는 특히 베토벤을 가장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에 걸쳐 수많은 곡들 가운데 네 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아마도 첫 교향곡의 탄생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는 동시대의 리스트나 바그너처럼 전통에서 벗어난 낭만주의의 음악을 작곡하기보다는 전통주의를 고수한 고전적 낭만주의자였다. 이러한 그의 작풍(作風)이 이를 뒷받침하듯 브람스는 베토벤의 적통을 잇는 그의 첫 교향곡을 탄생시켰다. 브람스의 제1번 교향곡은 베토벤의 제10번 교향곡이라고도 불릴 만큼 고전주의에 입각한 작품이었으며 베토벤 이후 쇠퇴해 가고 있던 독일 교향곡의 전통을 다시 세웠다는 평을 받았다.

베토벤과 브람스는 작곡을 하는 과정이 매우 서로 흡사했다. 오랜 시간 동안 음악적인 아이디어를 곱씹으며 다시 수정에 수정을 거치면서 새롭게 탄생시킨 곡들은 그야말로 해산의 고통이었다. 브람스의 제1번 교향곡 역시 첫 시작부터 완성까지 20여 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완성됐다.

추상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며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바실리 칸딘스키는 “음악적인 음은 영혼에 이르는 직접적인 통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음악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향을 일으킨다”라고 말했다. 그러기에 베토벤과 브람스, 그들에게 있어서 고통의 여정을 통과한 음악들은 우리의 영혼을 터치하며 그 안에 그들의 삶에 대한 철학적인 고뇌와 역경의 드라마가 녹아져 우리에게 깊은 명상과 명품적 소리의 빛깔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유럽에서 날아온 정명훈, 그는 누굴까? 그의 명품 컷은?  

참으로 못살던 나라, 매 끼니 조차 해결하기 어려웠던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던 나라, 그래서 인사가 “진지 잡수셨습니까?”로 문안 인사를 드렸던 나라,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코리아’가 어디 붙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음악으로 뭘 좀 한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던 그런 우리네 시절이 있었다. 그때 우리에게 희망을 준 사건 하나가 빛바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온통 국내의 모든 언론과 방송이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고 크게 이슈화 했던! 심지어 몬트리올 올림픽의 스타 양정모처럼, 칠전팔기 홍수환처럼 카퍼레이드를 하며 온 국민의 영웅처럼 떠올랐던... 단 한 사람! 정명훈! 

당시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구소련의 자존심인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등 없는 2등으로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후 피아니스트 정명훈은 또다시 지휘자 정명훈으로 우리 앞에 새롭게 변신한 모습으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프랑스 바스티유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했다.

다음은 내한공연 당시 모 언론에서 이 사건을 기사화한 것이다.

“정명훈의 바통(지휘봉)은 자전한다. 우주를 향하여 끝없이 탐험하듯 공전한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무아(無我)의 잠에 빠져든다. 휘황한 소리의 카오스다. 감은 눈 속으로 삼라만상이 보인다. 이윽고 그것은 멋진 예술적 코스모스가 된다. 지난 나흘간 우리는 ‘정명훈 열병’에 걸렸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황홀한 열정과 음악이 공명(共鳴)한다. 정명훈이 이끄는 프랑스혁명 200주년의 음악 기사(騎士)들이 우리들 앞에 섰다.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말한 것처럼 우린 정명훈을 위해 해준 것이 없는데, 그는 이렇게 우리 앞에 기사장으로 나타났다” 

(객석 1990. 8월호 커버스토리 배석호 기자)

이렇게 그는 우리 앞에 나타났고 우리에게 최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또한 들려주었다. 이후 그를 닮고자 했던 수많은 정명훈 키즈들은 대한민국에 클래식의 부흥을 가져다주었다. 세계적인 최고의 교향악단과 최고의 아티스트들의 내한연주는 줄을 잇고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유럽 못지않은 클래식의 대호황을 맞았다. 이처럼 한 사람으로 인한 영향력은 나비효과처럼 세계 속의 클래식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을 자리매김하는데 크나 큰 흔적을 남겼다.

이제 20년 5개월... 마에스트로 정명훈과 KBS교향악단의 만남은 그러한 의미에서 더욱 감회가 깊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KBS교향악단과의 첫 만남을 1984년 1월 28일 제264회 정기연주회를 시작으로 이후 KBS교향악단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로 1998년 2월 12일~13일 KBS홀과 예술의전당에서 펼친 제493회 정기공연까지의 총 13회 만남을 가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제493회 정기공연에서는 베토벤 ‘레오노레 서곡’ 3번으로 시작하여 이영조 작곡 ‘춘향가’ 중 ‘사랑가’를 국악인 안숙선 씨가 불렀으며, 차이콥스키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윤이상의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예악’,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익태 ‘한국 환상곡’을 연주했다. 이후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강산이 두 번 변했다. 20년 전과 지금, 과연 마에스트로 정명훈에게는 어떠한 의미와 차이점이 있을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함께 세계를 주름잡은 음악인으로서 그의 삶은 이제 그 안에 대한민국이 있고 곧 통일을 앞둔 한반도가 있으며 과거 오랫동안 통일 음악회를 위한 그의 열정과 노고에 대한 결실이 담겨져 있다.

국민의 오케스트라 KBS교향악단과 마에스트로 정명훈, 이제 곧 그 결실의 날,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 ‘Big Day’가 서서히 우리 한반도에 다가오고 있다.

<문화 칼럼니스트 Alex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