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전의 개념 바꾼 사막의 폭풍 ‘걸프전쟁’ 발발

중동 미국의 절대적 영향 하에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계기 맞아

2013-12-31     신혜영 기자

1991년 1월9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하면서 고조된 걸프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미국과 이라크의 외무장관이 만났다. 회담은 6시간 만에 결렬됐고 이라크는 걸프사태를 해결하려면 팔레스타인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담결렬로 결국 8일 뒤인 1991년 1월17일 미국이 주도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34개 다국적군이 이라크 공격을 개시했다.

[1991년 1월17일] 걸프전쟁 발발
걸프전쟁(페르시아만전쟁)은 쿠웨이트를 침공해 일어난 전쟁으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1937년 4월28일~2006년 12월30일) 대통령은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진 대아랍국 부채의 면제하며 보다 많은 석유자원의 확보했다. 이라크는 실지회복 및 중동지역 패권국가로서의 위치 확보를 위해 1990년 8월2일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해 점령하고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속주로 삼아 통치권을 행사했다.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각국은 8월2일부터 12건에 이르는 대 이라크 유엔 결의안을 통과, 유엔 안보리는 즉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규탄하고 무조건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660호)과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 결의안(661호) 등을 채택했다.
미국과 소련도 9월9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걸프사태에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했으며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 강대국과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 등 중동 여러 나라가 다국적군을 구성해 이라크에 군사적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라크가 철수의사를 보이자 않자 유엔 안보리는 11월29일 이라크가 1991년 1월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무력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678호)을 채택했다. 1991년 1월9일 열린 미국과 이라크간 외무장관 회담이 결렬되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34개 다국적군은 1월17일 이라크에 대한 공습을 개시, 압도적 공군력을 바탕으로 1개월간 10만여 회에 걸친 공중폭격을 감행해 이라크의 주요 시설을 거의 파괴했다. 2월24일에는 전면적인 지상공격을 벌여 지상전 시작 100시간 만에 100만 대군이라던 이라크군을 완전 궤멸시킴으로써 2월29일 종전을 선언했다. 이로써 다섯 달 전 이라크가 침탈한 쿠웨이트의 주권이 회복되었다.
걸프전쟁의 결과 중동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 하에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계기를 맞았다. 걸프전은 현대전의 개념을 바꿔 놓았으며 중동에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위해 열릴 중동평화회담의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꼭 2년만인 93년 1월 이라크의 비행금지구역 내 미사일 배치, 자국 영내 유엔기의 비행금지조치, 쿠웨이트 기습침공 등으로 2차 걸프전이 발발했다. 미국의 4차례에 걸친 공습에 이라크가 휴전을 선언, 종료됐다.

[1959년 1월1일] 쿠바혁명 성공
1959년 1월1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게릴라들이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다. 쿠바혁명은 바티스타를 타도하기 위해 1953년 7월26일 카스트로와 그가 이끄는 156명의 무장 청년들이 몬카다 병영을 공격하면서 혁명이 시작됐다. 비록 이 습격은 독재정권과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카스트로는 1955년 ‘7월26일운동’을 결성하고 독재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노선을 표방했다. 이후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를 중심으로 86명의 혁명군들은 1956년 12월2일 그란마호로 상륙한 후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의 17명이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출발한 게릴라운동은 1959년 1월1일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이루게 되었다. 총리가 된 카스트로는 미국자본을 접수하고 토지개혁과 사회개혁을 실시했다. 곧바로 일정 한도 이상의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고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했으며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배하는 획기적인 농지개혁에 착수했다. 1960년 후반 이후부터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미국기업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단행하고 4월16일 카스트로가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카스트로는 1965년 쿠바 사회주의혁명 통일당을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1976년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해 최고 권력자가 됐다.

[1924년 1월3일]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 발굴
1924년 1월3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 박사가 고대 이집트왕 투탕카멘(BC 1333~1323 재위)의 묘를 발굴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귀중한 유물들이 3,000년이 넘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빛을 보게 됐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모두 네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묘 앞방에서는 사자모양의 침대를 비롯한 가구 여러 점이 나왔고 관을 들여놓는 현실(玄室)에서는 키 168㎝ 왕의 미라가 여덟 겹으로 싸인 채 안치돼 있었다. 맨 안쪽의 매장실에는 네 겹의 금박을 입힌 나무상자 안에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석관이 있으며 이 안에는 세 겹의 관이 들어 있다. 투탕카멘왕의 미라는 3중 관 속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특히 맨 안쪽의 관은 110kg의 순금으로 제작되었고 색유리, 라피스 라줄리, 터키옥, 홍보석 등으로 상감처리한 정교한 조각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 관안에서 미이라가 발견되었고 머리 부분에는 무게 11kg의 황금가면이 덮여 있었다. 왕의 미이라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고, 시신의 부검결과 뇌의 치명적인 손상으로 즉은 것으로 판명되어, 암살 등의 비극으로 후계자도 없이 통치를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 덕분에 투탕카멘은 그보다 오래 살았거나 훌륭한 치적을 남긴 어떤 전임자나 후임자보다도 유명해졌다.
투탕카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최초의 파라오의 무덤으로서 완벽하게 보존된 고대이집트의 유물들은 당시 이집트의 예술성, 기술을 직접 접할 수 있으며 당시의 왕권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파라오의 묘를 통해 이집트 왕권의 황금기(세티, 람세스) 시대의 왕조의 장례식과 무덤은 얼마나 화려할지 예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투탕카멘의 존재를 보증하는 유물로서 그 시대의 역사적 기록의 사실여부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제일 큰 의의다. 한편, 발굴을 후원한 영국의 카나번 백작은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기 직전 모기에게 물려 목숨을 잃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투탕카멘의 저주라고 믿었다. 그러나 카터 박사는 발굴 작업을 밀어붙였다. 카터가 카이로박물관에 소장시킨 발굴품은 1,703점.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예술,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유물로 평가됐다.

[1951년 1월4일] 1.4후퇴, 서울 공산군 치하
6.25전쟁 7개월째에 접어든 1951년 1월4일 유엔군은 두 달 전부터 전개된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남쪽으로 쫓겨 내려오다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1950년 11월 북한공산정권을 구출하기 위해 한국전에 개입한 중국공산군의 공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 두만강 선에서 후퇴를 하게 되어 12월 말 서부전선에서는 임진강선까지 밀렸으며 동부전선에서는 12월24일 흥남철수를 단행했다.
1951년 1월 초 중공군은 주공 방향을 서울에 두고 철원, 연천 쪽에서 4개 군을 앞세워 서울을 다시 압박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해 서쪽으로부터 터키여단·미제25사단·영연방제27여단·국군제1사단 등을 배치했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북한공산군의 중동부전선 돌파로 서울방어가 어렵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부산으로 후퇴했고 유엔군도 서울로부터 철수를 완료했다. 1.4후퇴로 불리는 유엔군의 퇴각으로 서울이 다시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당시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유엔군은 1월25일부터 반격을 재개해 2월10일, 인천과 김포(金浦)를 탈환하고 3월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한다.

[1982년 1월5일] 야간통행금지 해제
1982년 1월5일 새벽 4시를 기해 37년간 계속된 ‘야간통행금지’ 조치가 해제됐다. 일부 전방의 접적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일제히 해제되었다. 다만 제주도(1964)는 관광 활성화, 충북(1965)은 해안이 없는 내륙지대라는 이유로 조기에 해제됐다.
야간통행금지는 광복 후 1945년 9월, 미 군정사령관 존 R.하지(John R. Hodge) 중장이 오후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을 제한한 ‘군정포고 1호’를 발동하면서 시작됐다. 빈곤 속에서 횡행하는 범죄를 줄이는 등 순기능도 있기는 했지만 국민의 야간생활 통제는 물론 인신(人身)을 구속하는 수단 등으로 작용함으로써 순기능보다 훨씬 많은 반발과 역기능을 불러일으켰다. 야간 통행금지는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미군정에 의해 시작돼 박정희 정권까지 계속 된 야간통행금지는 전두환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해제됐다. 이유는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제홍보용이기도 했으나 비정상적인 정권 탈환에 따른 국민의 반발을 무마시키려는 속내를 감춘 채 시의 적절하게 야간통행금지조치 해제계획을 진행했다. 1981년 11월19일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민주한국당·국민당이 만장일치로 야간 통행금지 해제건의안을 채택하기로 합의하고, 그해 12월15일 국회 본회의에서 건의안을 통과시킨 뒤 이듬해 1월5일 드디어 해제조치를 단행했다.
야간통행금지 조치가 해제되자 야간 통행금지의 상징인 서대문 로터리를 가로막았던 육중한 바리케이드가 걷혔다. 인적이 없던 한밤의 도심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대가 왔다.

[1913년 1월10일] 티베트 독립선언
중국에서는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라고 부른다. 약칭하여 ‘짱(藏)’이라고도 부르며, 주도(主都)는 라싸(拉薩)이다. 중국의 서쪽 끝에 있으며 인도·네팔·부탄·미얀마 등의 국가와 맞닿아 있어 개방확대와 및 변경무역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고대에는 창족[羌族]과 융(戎)의 영토였으며,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때는 토번(吐蕃)으로 통일된 국가를 이루었다. 원(元) 나라 때는 선정원(宣政院)에 직속되었고, 청나라 때는 전장(前藏)·후장(后藏)·객목(喀木)·아리(阿里) 4개 부(部)로 나뉘었으며, 1663년(강희 2년)부터 티베트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티베트는 13~14세기에는 원나라의 간접적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1750년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팽창 정책으로 보호령이 되었다. 청나라의 느슨한 지배를 받던 티베트는 20세기 남아시아의 전략적 기지를 차지하기 위해 침공에 나선 영국의 손에 들어간다. 영국 정부는 티베트에 문호 개방과 통상, 외교관 상주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티베트 정부가 이를 거절하고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으려 하자 무력 침공을 단행했다. 영국군은 1904년 8월3일 라싸에 입성했고 9월7일 강압적으로 라싸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2년 뒤인 1906년 영국은 청나라와 베이징조약을 체결하면서 라싸조약의 권리를 상당부분 포기했다. 이후 영국은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고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티베트는 청 왕조가 붕괴된 틈을 타 1913년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티베트는 독립국가로 존재했던 탓에 중국의 위협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1950년 인민 해방군이 진주하면서 다시 중국에 강제 편입됐다. 이후 티베트는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는 고난의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