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에 자극받은 韓國, ‘메가 FTA’ 참여로 선회하나

美·日과는 TPP, 中과는 FTA… 안보·경제 균형 맞추기 고심

2013-10-02     김미란 기자

미국과 일본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논의가 급진전되고 있는 가운데 경제블록을 구성하거나 이를 강화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경쟁이 불을 뿜고 있다. 특히 무역전쟁시대를 맞아 주요국의 자유무역협정(FTA)이 거미줄처럼 엮이면서 글로벌 경제블록 간 합종연횡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패권경쟁도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자유무역지대의 ‘공백지대’로 분류됐던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블록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일본이 미국과 밀착관계를 보임에 따라 상대적으로 FTA에 소극적이었던 중국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본격적인 행보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그동안 희토류 등 지하자원을 무기로 내세우기 위해 선진국과 자유무역에 관심을 두지 않던 중국 입장에서도 역내시장의 지배력을 높이려는 미국과 일본의 공조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거세진 경제블록 다극화 움직임
현재 배타적 자유무역권을 의미하는 주요 경제블록은 북미와 유럽·동남아·남미 등에 걸쳐 있다. 이들은 그동안 대륙별로 떨어져 각각의 독자적 영토를 구축해왔다. 하지만 태평양을 가로지른 TPP 출현이 임박한데다 경제블록 간 FTA도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어 본격적인 경제권 다극화시대 개막이 머지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경제블록의 원조로는 지난 1993년 11월 마스트리히트조약으로 출범한 EU가 꼽힌다. 현재 27개국이 가입해 있으며 이들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은 17조 5,000억달러에 이른다. EU는 특히 경제블록 최초로 단일통화인 유로를 도입해 가장 긴밀한 통합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4년 1월 미국·캐나다·멕시코 정부가 상호관세와 무역장벽을 폐지하기로 하면서 발효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경제규모가 17조 2,700억달러에 달해 규모면에서 EU를 앞선다.
필리핀·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태국·브루나이·베트남·라오스·미얀마·캄보디아 등이 가입한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도 주요 경제블록 중 하나로 분류된다. 아세안은 최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경제력 팽창에 힘입어 미국과 EU 등 관련국들의 러브콜을 한몸에 받고 있다.
하지만 개별국가 간 경제력의 편차가 워낙 커 개방 정도는 상대적으로 느슨한 편이며 최근에는 싱가포르·태국·베트남 등이 선진국들과 각각 FTA 협상에 나서 원심력이 강해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2008년 5월 결성된 남미국가연합(UNASUR)은 최근 상호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모습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비슷한 형태의 역내펀드인 라틴아메리카기금(FLAR)을 확대하는가 하면 상호무역에서 자국화폐 결제 비중을 높이기로 하는 등 양대 경제권에 맞먹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모습이다.
이밖에 페르시아만 연안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카타르·오만·바레인 등 6개국이 참여한 걸프협력회의(GCC) 역시 오일머니를 앞세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EAU도 푸틴의 강력한 카리스마 아래 서서히 모양새를 갖춰갈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TPP 참가로 우리 정부 분위기 달라져
최근 우리 정부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TPP)에 참가하기로 가닥을 잡은 배경에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무역 질서가 재편되는 세계경제 트렌드를 감안한 전략적 판단이 깔려있다. 아시아를 무대로 미국과 중국이 안보·경제 문제로 충돌하는 상황에서 중국과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미국·일본과는 TPP를 체결해 균형을 맞추겠다는 의도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명박 정권에서도 TPP 가입을 검토했지만 당시에는 “때가 아니다”라는 의견이 많았다. 정부 관계자는 “한·미 FTA를 체결한 상태에서 다시 미국이 주도하는 TPP에 참여해봐야 실익(實益)이 없다는 판단이 우세했다”고 말했다. TPP 참가국 가운데는 농산물 수출국이 많아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에 따른 국내 반발이 클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미국 주도의 TPP에 대해 중국이 거부감을 표현해 온 것도 한국 정부가 TPP 가입에 조심스러운 이유였다. 정부는 지난해 말 TPP에 대응해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주도하고 중국이 지원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RCEP)에 참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 후에는 경제·통상 관련 부처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가장 큰 전환점은 지난 3월 일본이 TPP 참여를 공식 선언하면서부터다. 박천일 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일본이 TPP에 들어감으로써 FTA 경쟁에서 단번에 한국을 따라잡고, 나아가 TPP 참가국 가운데 한국과 FTA를 맺지 않은 멕시코, 캐나다 등 4개국에서 우리보다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생겼다”고 말했다. 미국·일본이 TPP를 통해 기술 표준 등 각종 국제규범을 만들어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TPP를 ‘중국 포위망’으로 인식했던 중국이 자국의 참여 가능성을 열어 놓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도 우리 정부의 판단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지난 5월 30일 중국의 TPP 협상 참여 여부에 대해 “참가의 장단점,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 날에는 중국 외교부도 “TPP 교섭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 고위 관계자는 “시점이 문제일 뿐 TPP에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은 이미 세워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무역협회 등도 “최대한 빨리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중·일 FTA, RCEP는 동력 빠질 듯
한국이 TPP 참가를 공식 선언할 경우 동아시아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면에서도 파장이 예상된다. 우선, 한국이 오바마 정부의 ‘동아시아 중시 정책’의 경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TPP에 가입함으로써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김영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지역통상팀장은 “최근 중국이 TPP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한국이 TPP에 참여할 경우 중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경제 통합 논의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다”며 “TPP 참여에 앞서 중국과 구체적인 협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TPP 참여로 고립 위기를 느끼는 중국이 한·중 FTA 협상에 속도를 올릴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현재 양국 관계가 냉각된 일본과는 TPP를 계기로 협력이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한·중·일 FTA나 RCEP 등 한국이 참여하는 지역 차원의 다자간 FTA는 모멘텀을 잃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한·중·일 FTA는 각 국가 간의 이견이 크고, TPP 참여를 선언한 일본이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크지 않다. 미국이 이끌고 가는 TPP와 달리 RCEP는 중심 추진국이 없고, 참가국의 상당수가 TPP에도 참여했거나 참여를 검토하는 상태다.
한국이 TPP에 참여하려면 미국뿐만 아니라 기존 참여국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미국 정부는 무역대표부 관리들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도 TPP에 참가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공식 외교 채널로 한국에 TPP 참여 요청을 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 정부관계자의 말이다. 박천일 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현재 TPP 협상에서 미국과 동남아시아 국가 간의 이견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성공적인 FTA 경험이 있는 한국을 파트너로 참여시켜 이들에 대한 설득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 농수축산물 추가 개방 불가피
우리나라가 TPP에 참여하더라도 국내 제조업이 받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공산품 분야는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시장을 개방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 개방 수준이 낮은 농수축산업 분야는 어느 정도 피해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예상이 적지 않다.
허윤 서강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TPP 참여를 선언한 12개국 중 7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상태”라면서 “한·미 FTA 등이 체결되면서 공산품은 상당 부분 개방했고 관세율도 낮기 때문에 추가적인 시장 개방에 따른 득실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시점에선 비(非)농산물 분야의 업종별 득실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TPP는 환경, 노동, 지식재산권, 원산지 표시, 무역 구제 등의 규범에 대해선 참여국이 공통으로 정하지만, 세부적인 개방 품목이나 관세율은 TPP가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참여국 간 양자(兩者) 협상을 통해 결정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TPP에 참여하지 않으면 우리 기업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내놓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배제한 채 기술 표준을 결정하고 다른 참여국이 이 결정에 따른다면, 한국 기업은 기술 표준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산업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TPP에 참여하는 신흥국들이 지식재산권 보호나 조달 정책 개선 등 투명성 강화에 나서면, 우리 기업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시장 개방 수준이 낮은 농수축산물 분야다. TPP는 기본적으로 모든 상품의 예외 없는 관세 철폐를 목표로 하고 있다. 관세 철폐 기간도 원칙적으로 10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농수축산물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최세균 원장은 “농축산물 수출이 많은 호주·뉴질랜드에 시장을 개방해야 하는 것이 부담”이라면서 “이미 우리와 FTA를 체결한 미국·칠레 등에 추가로 농축산물 시장을 개방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