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아랍의 봄’ 다시 혼돈의 격랑 속으로
최악의 유혈충돌 이집트 … 시리아·리비아·튀니지·예멘도 혼란 지속
2011년 초 북아프리카 아랍권 국가의 독재 정권을 잇달아 무너뜨린 ‘아랍의 봄’ 민주화 물결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중동의 맹주를 자처한 이집트는 물론 ‘재스민 혁명’의 발원지 튀니지, 그에 이웃한 리비아는 혼란 정국이 지속 중이고 시리아 사태는 종파 내전으로 비화했다. 아라비아반도에서 아랍의 봄 여파로 유일하게 정권이 바뀐 예멘에서는 현재 국제테러조직 알카에다와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다.
중동 역사학자와 정치분석가들은 아랍의 봄을 맞이한 국가들이 민중봉기를 이끌었던 수십년간의 철권통치 아래 정치, 경제적 침체를 거쳐 새 정부와 시민사회를 건설할 채비를 갖췄다고 평가했다. ‘아랍의 봄’은 또 이집트와 튀니지, 리비아, 예멘 등 4개 국가에서 독재 정권 붕괴란 1차 목표를 달성한 데 이어 민주주의, 인권, 사회적 평등, 인간의 존엄 등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는 여전히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고 있고 이슬람과 세속주의 세력,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결이 격화하는 등 안정기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동 정치 분석가인 사르키스 나움은 “낡은 중동 질서가 사라지고 새로운 질서가 피로 그려지고 있다”고 레바논 일간 안 나하르에 밝혔다.
일각에서는 작금의 혼란이 석유자원 패권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얽힌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불안감을 증폭시켜 아랍의 봄이 ‘아랍의 겨울’로 바뀌었다는 관측도 있다.
이집트 사태 악화일로
아랍의 봄을 타고 중동 다른 나라에 앞서 혁명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아 온 이집트는 지난 7월3일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 축출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무르시가 1년간의 집권 기간 군부·사법부와 권력 다툼, 물가 급등, 높은 실업률, 치안 악화 등으로 국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은 끝에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당장 정치적 안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군부가 이끄는 이집트 과도정부는 무르시의 지지기반인 무슬림형제단을 테러 단체로 지목하고 시위대에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힌 가운데 이슬람 세력은 군부 반대 시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겠다고 맞서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걸프 국가의 중재 노력도 물거품이 된 가운데 앞으로 정치적 해결 가능성도 작아 보인다.
유혈 사태에 따른 사상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달 14일 군부가 카이로의 무르시 지지 시위대를 무력 진압한 사건 이후 지금까지 나온 사망자가 800명을 넘어섰다. 지난 6월26일 이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나서부터는 이집트 전역에서 최소 1,042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2011년 시민혁명 당시 발생한 사망자 850여 명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군부의 재집권 논란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군부는 장갑차와 불도저, 헬기까지 동원한 이번 강경 진압으로 정치적 해결력과 중재 능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걸프 국가의 정치적 해결 촉구에도 군부는 끝내 이를 외면, 과거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 때 ‘권위주의 통치’를 답습한 꼴이 됐다.
야권과 시민사회 단체는 일단 군부를 계속 지지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한 점에서는 유감을 나타내는 분위기다. 군부의 강경한 태도에 야권과 시민사회 단체가 나중에 반발한다면 이집트 정국은 곧바로 격랑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유엔을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국가들의 압박 강도도 세지고 있다. 취약한 경제 구조 탓에 외국의 원조가 중요한 이집트로서는 우방을 잃는 게 다른 중동 국가보다 뼈아플 수밖에 없다.
세계의 주요 국가는 군부의 무력 진압을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미국도 공동 훈련을 취소하고 연간 13억 달러 상당의 대이집트 군사원조를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군부 통치가 장기화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군부가 관리하는 과도정부는 지난 8월13일 전국의 주지사 18명을 새로 임명하면서 11명을 군 간부 출신으로 채웠다. 나머지 7명 중 2명은 경찰 고위 간부 출신이다. 정부 인사의 투명성 부족을 보여주고 협의 과정을 등한시하는 점을 드러내면서 과거 권위주의 통치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무르시 정권 축출 이후 정국 혼란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이집트인 다수와 국제사회가 군부 통치의 장기화를 반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무르시 축출 당시 군부를 지지했던 야권의 대표 주자인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부통령 사임의 여파도 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임이 자유·세속주의 세력의 분열을 증폭시킬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엘바라데이 이외 사임한 야권 출신 정부 각료는 아직 없지만, 그의 사임 자체가 자유주의 세력의 혼란상을 그대로 드러낸 셈이 됐다. 야권 사이에서 엘바라데이의 사임을 두고 양심 있는 행동이란 호평과 함께 책임 회피란 비판을 동시에 받은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무르시 정권 붕괴 직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이끌었던 야권 그룹도 분열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일부 시민단체 활동가는 타마로드(반란)에서 이탈했다. 영국 왕립역사학회의 디팍 트리파티 교수는 “이집트 전역이 매우 분열된 상황이어서 어떤 정권이라도 전체를 통치권에 두기 어려울 것”이라며 “군부와 협력했던 정치인들도 이집트 사회에서 고립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군부의 유혈 진압 사태로 과도정부는 불안정해지고 민주적 변화에 대한 희망에도 상당한 후퇴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현재 무르시 지지 시위대의 엄청난 인명 손실에도 무슬림형제단이 군부에 순순히 백기 투항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슬람 학자인 하산 알반나가 1928년 이집트에서 설립한 무슬림형제단은 80년 넘는 역사를 이어오면서 이집트뿐 아니라 리비아, 알제리, 튀니지, 요르단, 수단 등지로 세력을 확장해 현재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이슬람 조직으로 성장했다. 2011년 무바라크 정권이 붕괴한 뒤 세력을 키워 지금도 이집트 정계와 경제계, 언론계 등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군부는 무르시 축출 이후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무슬림형제단을 꼽고 무슬림형제단 지도부 300명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단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 축소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의 끈질긴 생명력을 감안할 때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특히 무슬림형제단이 지하조직으로 활동하며 테러 등의 방법을 동원해 반격에 나서거나,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는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테러를 감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슬림형제단은 최악의 유혈참사가 벌어진 날에도 국민에게 “거리로 나와 군부의 유혈진압 중단에 나서달라”며 새로운 시위를 촉구했다. 이 단체 회원은 군부의 진압 작전이 이뤄진 기자 지역에서 정부 기관 청사를 습격하기도 했다.
길 잃은 ‘아랍의 봄’
그렇다면 시리아의 상황은 어떨까. 시리아 유혈 사태가 발생한 지 2년5개월이 지났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정권은 건재하고 사태 해결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국제사회가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정부군과 반군의 끊임없는 피의 보복도 되풀이돼 지금까지 10만 명 이상 이 숨진 것으로 유엔은 추산했다. 사망자는 반군 거점인 중부도시 홈스, 하마는 물론 수도 다마스쿠스, 북부 최대 상업 도시 알레포, 다라, 이들리브 등 전역에서 속출했다.
시리아 정부군은 반군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지역 곳곳에 수시로 폭격을 가하고 있다. 정부군과 반군 모두 화학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시리아 내전 장기화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내전 발발 이후 지금까지 국외로 피신한 난민은 200만 명에 육박하고 시리아 내부에서 떠도는 난민도 400만 명을 크게 뛰어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에는 시리아 정부군이 민간인 거주지에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1,300여 명이 사망하는 참변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 시리아 내부에서 민간인 등 1만 명 이상이 당국에 체포됐다고 인권단체는 밝혔다. 그러나 시리아 정부가 2011년 3월 반정부 시위 발발 이후 국외 취재진과 인권 단체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 정확한 통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 격화와 함께 종파 갈등도 심화하면서 이 승자 없는 내전의 끝은 국가분리로 귀결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현재 정권을 잡은 시아파 분파인 알라위트파와 국민 다수인 수니파가 각각의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온건 이슬람 정치 세력이 집권한 튀니지는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인기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는 지난달 이집트 무르시 정권 축출에 영향을 받고나서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지속하고 있다.
튀니지 야권 지도자 2명이 올해 암살까지 당하면서 이슬람 집권당에 대한 불만도 크게 높아졌다. 국제공화주의연구소가 최근 조사한 설문을 보면 튀니지의 국가 진로에 불만을 표시한 응답자가 77%로 최고조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튀니지에서는 2011년 10월 총선에서 온건 이슬람당인 엔나흐다당이 압승하면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정부를 구성한 상태다. 튀니지의 민주화 시위로 2년 전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전 대통령 정권이 붕괴했으나, 이슬람주의자들이 이끄는 과도 정부와 세속주의자들의 충돌이 멈추지 않아 서민 경제의 어려움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튀니지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정치체제에 이슬람 색채를 강화하려 한다는 우려가 세속주의 세력 내에서 제기돼 왔다.
리비아는 이집트와 함께 이슬람 과격 단체가 세를 과시하는 대표적인 아랍국으로 꼽힌다. 리비아에서는 무아마르 카다피 전 국가원수가 2년 전 권력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미국과 서방의 외교공관이 시위대나 무장 세력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리비아는 2011년 10월 카다피 사망 후 사실상 내전을 끝냈지만 안사르 알샤리아 등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의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공공의 적이었던 카다피가 40년 넘게 리비아를 철권통치하는 동안 보이지 않았던 지하드 무장단체까지 등장했다.서부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세력과 동부 벵가지에 근거지를 둔 이슬람 세력의 갈등도 골칫거리다.
예멘 역시 30년 철권통치를 한 알리 압둘라 살레 전 대통령이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여전히 유혈사태가 지속하고 있다. 국제 테러조직인 알 카에다는 예멘 남부의 아라비아반도지부(AQAP)를 중심으로 요인 암살을 비롯해 정부 겨냥한 테러를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알카에다의 공격 우려가 커지면서 미국과 영국 정부는 지난달 예멘 주재 외교관들을 철수시켰다. 미국과 예멘군은 지난해 5월 대대적인 알카에다 소탕 작전을 전개했으나 곳곳의 산악지대로 흩어진 알카에다 대원은 요인 암살을 비롯해 예멘 정부를 겨냥한 테러를 계속 하고 있다. AQAP는 예멘 정국이 부족 간 분쟁, 정치불안 등에 시달리는 틈을 타 정부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살레 전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정치 활동을 계속하며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