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이야기

2006-06-30     글/ 신혜영 기자
100년 이상의 역사와 함께 해온 한국 축구 신화
1882년 한국 축구 태동부터 2006 독일월드컵 본선진출까지… 끝나지 않은 신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지난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폴란드에 이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잇따라 격파하고 기적처럼 4강 진출이라는 최고의 업적을 이뤄냈다. 특히 온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던 거리응원전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한국인의 단합과 긍지를 보여주었다. 100여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와 함께 걸어온 한국 축구는 2006 독일 월드컵 본선진출과 함께 다시 한번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축구의 태동
영국을 모태로 하는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지난 1882년(고종 19년)인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호스의 승무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식 축구의 보급은 1904년 서울의 관립 외국어 학교에서 체육 과목의 하나로써 채택하면서부터이다.
한국 최초의 공개 축구 경기는 1905년 6월 10일 서울 훈련원(오늘날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간의 시합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 하에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로 1921년 제 1회 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 이어 1928년 5월 22일 조선심판협회(조선축구협회의 전신)가 창립됨으로써 한국에 정식으로 축구가 보급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와 함께 1929년부터 시작된 경성(서울)과 평양의 경평(京平) 대항전은 축구에 대한 관심을 크게 증폭시키며 전 민족이 즐기는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33년 9월 19일에는 조선축구협회가 정식으로 창립되었으며 초대 회장은 박승빈 씨가 선출되었다.


첫 본선 진출에서 4강 신화까지
일제 말기 해산되었던 조선축구협회는 해방과 함께 1948년 9월 4일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출범했다. 동시에 FIFA(국제축구연맹)에 가입했고, 1954년에는 AFC(아시아 축구연맹)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또한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에는 한국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발을 내딛었으며, 1954년에는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 최초로 진출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한국 축구는 1956년 제1회, 1960년 제2회 아시안컵에서 연속으로 우승함으로써 아시아 축구 챔피언으로서의 기세를 드높였다. 이어 1960년대 이후 메르데카컵, 킹스컵, 아시안게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등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각종 축구대회에서 수많은 우승컵을 차지함으로써 한국은 명실상부한 아시아 축구 최강으로 불리게 되었다. 각종 대회에서 기록한 혁혁한 성적과 선수들이 보여준 투지와 용감성으로 인해 한국 대표팀은 ‘아시아의 호랑이’로 불리었다.
1971년에는 한국 최초의 국제 축구대회인 박대통령배 아시아 축구대회를 개최, 아시아 최고 권위의 대회로 성장한 박대통령배 아시아 축구대회는 1976년부터는 박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 1980년부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로 대회 명칭이 변경, 1995년부터 코리아컵으로 이름을 바꾸어 1999년까지 개최되었다.
특히 1983년 ‘수퍼리그’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한국의 프로축구는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기여하였고, 아시아 최초로 탄생한 본격 프로리그로서 주변 아시아 국가들에게 프로축구 출범을 자극했다. 5개 팀으로 시작한 한국 프로축구는 현재 13개 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K-리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한국 대표팀은 1954년 제5회 스위스대회와 1986년 제13회 멕시코대회, 1990년 제14회 이탈리아대회, 1994년 제15회 미국대회, 1998년 제16회 프랑스대회, 2006년 독일대회까지 6회 연속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함으로써 아시아 최다 월드컵 본선 진출국(통산 7회)이 됨은 물론, 세계 수준에 근접한 한국 축구의 우수성을 지구촌의 모든 축구팬에게 과시했다. 또한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20세 이하) 축구대회에서 축구 강국들을 물리치고 4위를 차지하며 한국 축구의 놀라운 힘을 세계에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열기와 함께 2002년 6월 한 달간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폴란드를 상대로 월드컵 참가 사상 첫 승리를 거뒀다. 이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잇따라 격파하고 기적처럼 4강에 진출이라는 한국 축구 100년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이뤄냈다.

월드컵축구대회 탄생배경
월드컵축구대회는 단일종목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행사로 월드컵은 1920년인 20세기 초 올림픽대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대회 축구경기에 남미, 아시아 및 아프리카를 포함한 22개국이 참가했으며, 1928년 암스텔담 올림픽에는 17개국이 참가 했다. 이때까지 FIFA에서 주관하는 축구대회는 없었다.
그 이전 1904년 제1회 FIFA총회가 열렸으나 축구 종주국 영국이 불참한 가운데 세계축구대회를 마련하자는 근본취지에만 동의 했을 뿐 세부사항에서는 토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1920년 5월 26일 FIFA가 독자적인 축구대회 개최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월드컵 축구대회가 탄생했다. 1924년, 파리에서 열린 FIFA총회에서는 세부논의까지 이루어져 ‘월드컵’을 세계축구 대회로 결정하게 되었다. 당시에 유럽프로축구팀들이 봇물처럼 생겨났다.
올림픽은 프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1926 FIFA총회에서는 프로와 아마추어 구분을 따지지 않고 진정한 세계챔피언을 겨루는 대회가 열릴 때가 된 것이라고 월드컵 축구 탄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FIFA 회원국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가운데 1928년 5월 26일 마침내 피파투표에서 23대5라는 일방적인 지지로 월드컵 개막을 선포 1930년 우루과이에서 첫 월드컵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대회 개최 2개월 전까지 유럽은 한나라도 참가신청을 하지 않았다. 줄리메 회장의 적극적인 교섭 결과 유럽4개국 포함13개국이 출전한 월드컵 첫 대회는 1930년 7월 13일~30일 동안우루과이의 3개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올림픽 중간 연도를 택해 4년에 한번씩 개최키로 한 월드컵은 프랑스에서 열린 제3회(1938)대회 이후 12년 동안 전쟁 때문에 중단되었다. 전쟁의 종식과 함께 1950년 제4회 대회가 브라질에서 재개되었다.


아찔했던 대한민국 명승부
▲디펜딩 챔피언인 브라질과의 최종전을 남긴 대한민국 청소년대표팀=박성화호의 첫 승전보는 후반 44분 박주영의 환상적인 프리킥 동점골과 후반 언저리타임에 2분 백지훈의 천금같은 역전골로 만든 그야말로 대한민국 역대 명승부다.
▲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 8강 우루과이전=박종환 감독이 이끈 한국은 멕시코와 호주를 연파하고 8강에 오른 뒤 남미의 전통강호 우루과이를 만났다. 한국은 신연호의 선제골과 우루과이의 동점골로 1-1이 된 채 연장을 맞았으며, 연장 전반 14분 김종부의 오른쪽 돌파에 이어진 크로스를 신연호가 결승골로 작렬하게 세계대회 4강이라는 아주 큰 새 역사를 썼다.
▲91년 포르투갈 세계청소년대회 코리아-아일랜드전=한국 축구 사상 처음 남북단일팀 코리아의 깃발을 들고 참가한 91년 세계청소년대회로 포르투갈, 아일랜드, 아르헨티나와 죽음의 조에 속한 대한민국은 조별리그 2차전에서 아일랜드에 지면 8강 진출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후반 11분 선제골을 허용하고 0-1로 끌려가던 후반 44분. ‘83년의 4강을 위한 남,북한의 질주를 해야 한다’고 초조해하던 고국의 팬들에게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고 북한의 최철이 후반 44분40초 남북을 하나로 만든 동점골을 뽑아냈다.
▲94년 미국 월드컵 한국-스페인전=댈러스 코튼볼구장에서 강호 스페인을 맞은 대한민국은 후반 초반 연달아 2골을 허용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었다. 남은 시간은 6분, 홍명보의 프리킥이 수비수 다리에 맞고 굴절돼 추격 골을 뽑았고 후반 44분 홍명보-황선홍으로 이어진 패스가 오른쪽에서 공간을 찾은 서정원의 발끝에 이어졌다. 골키퍼 카나사레스의 옆구리를 꿰뚫는 동점골이 터지는 순간 한국은 무적함대 스페인을 상대로 극적인 2-2 무승부를 연출해냈다.
▲97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 한?일전=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숙명의 대결을 펼친 한국과 일본은 팽팽히 맞섰지만 선제골은 야마구치의 로빙슛이 빨려들어 간 일본의 몫이었다.
적진에서 패색이 짙던 후반 38분에 최용수의 헤딩 패스를 받은 서정원이 솟구쳐 올랐고 머리에 맞춘 볼은 동점골이 됐다. 그리고 3분 뒤, 이민성은 일본 진영 미드필더 오른쪽에서 회심의 슈팅을 때렸고 볼은 한번 바운딩 된 뒤 골키퍼 가와구치의 옆을 스쳐 네트를 흔들었다. ‘후지산이 무너집니다’라는 캐스터의 탄성을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아주리군단과 맞선 히딩크호는 전반 4분 페널티킥을 얻어냈지만 안정환의 실축으로 팬들의 머리를 감싸 쥐게 했고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헤딩 선제골에 대전월드컵경기장은 한순간 침묵에 휩싸였다. 그러나 경기 종료 2분전 설기현의 왼발 슛이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를 무너뜨리는 동점골을 뽑아냈고, 연장 후반 12분에 세계를 경악시킨 안정환의 골든골이 터져 나와 명승부의 묘미를 보여줬다.


월드컵 역대 득점왕
▲제 1회 1930 우루과이 월드컵-Stabile(아르헨티나) 8골
▲제 2회 1934 이탈리아 월드컵-Schiavio(이탈리아)외 3명 4골
▲제 3회 1938 프랑스 월드컵-Leonidas(브라질) 8골
▲제 4회 1950 브라질 월드컵-Ademir(브라질) 9골
▲제 5회 1954 스위스 월드컵-Kocsis(헝가리) 11골
▲제 6회 1958 스웨덴 월드컵-Fontaine(프랑스) 13골
▲제 7회 1962 칠레 월드컵-Garrincha(브라질) 외 5명 4골
▲제 8회 1966 잉글랜드 월드컵-Eusebio(포루투갈) 9골
▲제 9회 1970 멕시코 월드컵-Muller(서독) 10골
▲제 10회 1974 서독 월드컵-Lato(폴란드) 7골
▲제 11회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Kempes(아르헨티나) 6골
▲제 12회 1982 스페인 월드컵-Rossi(이탈리아) 6골
▲제 13회 1986 멕시코 월드컵-Lineker(잉글랜드) 6골
▲제 14회 1990 이탈리아 월드컵-Schillaci(이탈리아) 6골
▲제 15회 1994 미국 월드컵-Stoichkov(불가리아)외 1명 6골
▲제 16회 1998 프랑스 월드컵-Suker(크로아티아) 6골
▲제 17회 2002 한,일 월드컵-Ronaldo(브라질) 8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