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37년 만에 일본서 환국
불운했던 황녀 덕혜옹주, 환국 20년 만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78세 세상을 떠나다
(시사매거진237호=신혜영 기자)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가 37년 만에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13세 때 강제로 일본으로 간 덕혜옹주는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병원 입원, 이혼 그리고 딸 정혜마저 실종되는 등 불운한 삶을 살아왔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며 평탄치 못했던 삶을 살다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德惠翁主)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高宗)과 궁녀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고명딸로서 5살 때 준명당에 유치원이 만들어질 정도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했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은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 당했고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했다.
1921년 서울에서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인 히노데 소학교에 다니던 덕혜옹주는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 무렵에 덕혜(德惠)라는 호를 내려 받았다. 그리고 1925년 3월 28일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13살 때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던 덕혜옹주는 항상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듬해인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했지만 정작 4월 25일 순종 사망 후 국장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이후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영면해 귀국했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그런 후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덕혜옹주는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진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하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고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된 덕혜옹주는 이혼하게 된다.(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 <흘러가는 데로>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마저 1956년 결혼했지만 실패하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긴채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이런 사실이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일한 김을한 기자에 의해 알려졌다.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에 들른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는 이방자 여사와 만난 자리에서 덕혜 옹주의 얘기를 들었고 이후 박정희정권에 들어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을 제창한다. 이에 구황족에 포함된 덕헤옹주는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37년 만에 일본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김포공항에서 열린 환영식에 의친왕의 며느리 등 많은 왕실인사들이 참석했다. 덕혜옹주는 행사가 끝난 뒤 창덕궁의 낙선재에 찾아가 순종의 계비(繼妃)인 순정효황후 (純貞孝皇后) 윤 씨를 만났다.
하지만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1968년 1월 21일] 1.21사태, 북한 특수부대 서울 침투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서울에 침투했다. 이들은 1968년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에게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1월 18일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은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31명은 국군복장에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이들은 서부 전선의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해 하룻밤을 숙영(宿營)한 후 이튿날 8시 30분경 임진강의 얼음판을 횡단, 당시 경기도 고양군 법원리의 삼봉산에서 2일째 숙영을 했다. 그리고 20일 앵무봉을 통과한 이들은 비봉,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밤 10시 서울시내 세검동 파출소 관한 자하문 초소에 이르렀다. 하지만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리자 이들은 “방첩대원들이다”,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가자” 등의 말을 하며 계속 행진했다.
약 400여m를 더 행진했을 무렵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 병력과 첫 접전이 벌어졌다. 이들은 검문경찰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지나가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 길의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이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되었다. 우리 측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갖추고 현장으로 출동, 28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2명은 도주, 1명을 생포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정부는 사태가 발생한 다음날 국회국방위원회에 사태의 진상을 설명하였다. 1월 24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261차 군사정전회의 본회담에서 유엔군측 수석대표는 푸에블로호사건과 함께 북한 게릴라 부대의 서울 침투와 그들의 민간인 살상 등 만행을 규탄했다.
북한측은 한국이 휴전 당사자가 아니므로 1.21사태는 본회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등 무리한 답변으로 그들의 만행을 호도했다. 그러나 1970년대 남북대화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이 사태가 좌경 극렬분자의 행동이었음을 시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을 창설과 학생군사훈련 실시를 하게 되었다.
한편 그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그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한국으로 귀순했다.
[1933년 1월 30일] 1933년 히틀러, 독일 총리 취임
독일민족 우월사상으로 무장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4.20~1945.4.30)가 독일 총리가 됐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공황과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히틀러는 이듬해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해 ‘총통 및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이 됐다. 히틀러는 경제적·정치적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해 국가의 발전을 꾀했고 외교계·경제계·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600만 명이 넘는 실업자들을 군수산업과 토목사업에 흡수시키고 세습농장법을 제정해 대농과 중농을 보호하며 식량의 자급자족화를 도모하는 등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1당 독재를 실시해 나치스친위대(SS)를 강화하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강제수용소에 가둬 혹독한 학대와 살육을 자행했다. 히틀러는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고 군비를 확장해 독일을 유럽 최강국으로 올려놓아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게 됐다. 히틀러는 이를 기반으로 1939년 9월 독일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고, 대생존권(大生存圈)을 수립하기 위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의 작전지령이 처음에는 효과를 거두어 프랑스에서 크게 승리했지만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전후부터 현실을 무시한 지령을 남발해 패전을 거듭했다. 1944년 7월 20일 과거에 그를 돕던 장군들과 보수제정파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기도했으나 히틀러에 대한 암살계획이 실패했다. 그러나 나치스의 퇴세는 이미 만회할 길이 없었고, 1945년 4월 29일 그는 베를린의 지하호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했다.
[1968년 1월 23일] 북한,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
승선인원은 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2명 총 83명을 태운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납치됐다. 납치된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조한 해군 정보 수집 보조함으로 중량 906톤, 길이 54m, 너비 10m, 시속 12 2노트에 구경 50㎜ 기관포 2문을 갖춘 비무장 함정으로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나포됐다. 김신조(金新朝)를 비롯한 북한 무장 비정규군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가 일어난 지 이틀 뒤의 일이었다. 이날 푸에블로호는 동경 127° 54′, 북위 39° 25′ 공해상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1시45분경, 무장한 4척의 북한 초계정과 미그기 2대의 위협하에 원산항으로 강제 납치되었다. 미 해군 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미 해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푸에블로호는 1월 23일 정오경 1척의 북한의 초계정으로부터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북한 함정은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 해군은 “공해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했다. 약 1시간 후 북한 함정의 지원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도착해 포위했다.
북한 미그기들이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한 초계정이 접근했고 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했다. 이때가 12시40분이었다. 푸에불로호는 “무력 저항을 하지 않았다”면서 원산항으로 끌려간다고 보고했다.
사건 다음 날인 1월 24일, 미국 측은 오전 11시 판문점에서 군 사정전위원회 본회의를 열어 1.21 사태와 함께 이 사건을 신랄히 규탄했다. 미국은 소련을 통한 외교교섭과 함께 판문점회담을 추진했으나 소련이 중재를 거부하고 북한도 강경한 태도를 보여 푸에블로호의 송환교섭은 난항을 거듭하게 된다.
25일에는 해공군의 예비역 1만 4000여 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대에 대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했으며,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위해 나갔다. 28일에는 추가로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킴으로써 한반도의 위기상황이 고조됐다.
결국 이 사건은 28차례에 걸친 비밀협상 끝에 미국은 푸에블로호의 북한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사과한다.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 23일, 승무원 82명과 시체 한 구가 판문점을 통해 송환됨으로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은 매듭지어졌다.
[1922년 1월3일]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 발굴
투탕카멘은 BC 1361년 9세의 나이로 이집트의 파라오에 등극, 18세에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재위했다. 이 때문에 그렇다고 할 업적도 없고 후세의 파라오에 의해 그의 기록은 점점 사라져 갔다. 더욱이 람세스 2세가 많은 신전에 조각한 왕명표에도 투탕카멘의 기록은 없다. 매장된 곳을 기록하지 않은 투탕카멘왕의 묘 위에 람세스 6세의 묘가 만들어졌는데 람세스 6세의 무덤은 파헤쳐졌지만 그 밑에 잠들어 있는 소년 왕의 무덤은 3,000년 이상이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00년경 왕가의 계곡의 발굴을 승인받은 미국인 시어도어 데이비스가 람세스 3세의 무덤 근처에서 투탕카멘의 이름이 기록된 도기와 인장을 발견했다.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이 자료를 보고, 미지의 왕 투탕카멘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리고 1922년 1월3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 박사가 룩소르 부근 나일강 서안의 ‘왕들의 계곡’에서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 투탕카멘(재위 BC 1361∼BC 1352)의 묘를 발굴했다.
투탕카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이집트 왕릉으로 발굴 당시 투탕카멘의 무덤에선 110㎏짜리 황금 관(棺)과 황금마스크(11㎏) 등 호화찬란한 금은보화와 합금되지 않은 철, 마르지 않은 향료 등 2,000여 점의 귀중한 유물이 3,000여 년이 넘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묘 앞방에서는 사자모양의 침대를 비롯한 가구 여러 점이 나왔고 관을 들여놓는 현실(玄室)에서는 키 168㎝ 왕의 미라가 여덟 겹으로 싸인 채 안치돼 있었다. 또 이집트 왕의 사냥, 전쟁 모습이 담겨 있지만 직접 원정을 이끌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근친 간의 혼인에 의해 태어난 데다 골질환과 선천성 내반족이 있어서 걷기가 아주 힘들었으며 언어 장애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발굴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이유 없이 사망하는 불행이 잇따랐다. 1923년 하워드 카터와 함께 이 무덤을 발굴했던 카나번이 모기에 물려 죽은 걸 시작으로 무덤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 13명이 원인불명의 병이나 자살 등으로 세상을 뜨자 급기야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생겼다.
카터가 카이로박물관에 소장시킨 발굴품은 1,703점으로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예술,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유물로 평가됐다. 투탕카멘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 마스크를 비롯한 3,000여 점의 부장품들은 현재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무덤 안에는 현실 정면 벽화와 관이 있고, 그 안에 투탕카멘의 미라가 잠들어 있다. 투탕카멘왕의 무덤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다.
한편, 2002년 9월엔 미국의 전 연방수사국(FBI) 요원과 유타 경찰국 범죄분석 반장으로 구성된 미국 연구팀이 투탕카멘 미라의 X선 촬영 사진과 무덤 내부 형태 등을 정밀 분석한 결과 타살이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