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이민법 개정

2006-05-16     글/ 김정숙 기자
美, 이민법 시위 주도 ‘히스패닉계’
경제적 파워, 인구수로 미국주류 위협, 단결력 과시
미국이 거센 ‘히스패닉 파워’로 들끓고 있다. 한달 넘게 계속되고 있는 라틴계 이민자 주축의 반이민법 시위가 의회의 갈지자걸음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제2의 민권운동으로 번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들이 없으면 미국 경제의 미래도 없다는 호언도 나온다. 정부와 기업도 이래저래 눈치 보기에 바쁘게 된 히스패닉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았다.


뉴멕시코(히스패닉 비율 42.1%), 캘리포니아(32.4%), 텍사스(32%), 애리조나(25.3%), 네바다(19.7%)주 등은 이들이 없으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라티노의 비중이 크다. 이런 히스패닉이 최근 단결력을 과시하고 있다. 불법이민자를 죄인으로 몰아 처벌하겠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센센브레너 법안이 지난해 말 하원을 통과한 것이 계기가 됐다. 반(反) 이민법으로 불리는 이 법안을 규탄하기 위해 지난 4월 10일 워싱턴·뉴욕·휴스턴 등 70여 개 도시에서 열린 집회는 사실상 히스패닉들의 행사였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이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흰색 티셔츠로 복장을 통일해 단합된 힘을 과시했다.
이날 10만여 명(경찰 추산)이 모인 워싱턴의 미 의회 앞 내셔널몰은 흰색 물결로 넘쳐났다.사회자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우리는 미국이다(We are America)” “우린 범죄자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노(No) 센센브레너 법안”이라고 외칠 땐 함성이 더욱 커졌다.
워싱턴 지역 호텔, 식당업 히스패닉 노조 간부인 라파엘 로페스(39)는 “1985년 엘살바도르에서 밀입국했다가 8년 만에 시민권을 얻었다”며 “이민자의 나라에서 이민자를 범죄자로 취급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우리가 없으면 누가 이 나라의 화장실과 길을 청소하고, 빌딩과 다리를 세우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시민권을 가진 히스패닉 가운데 유권자로 등록한 경우는 고작 41%다. 로페스는 “5월 1일엔 모든 히스패닉이 파업을 한다”며 “그날 미국은 우리의 힘을 확실하게 느끼게 될 것이며, 11월 중간선거에서도 그걸 실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에서는 시위대가 ‘부시 퇴진’ 구호를 외치기도 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주를 비롯한 일부에서는 ‘경제 활동 보이콧’ 주장도 나왔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인구가 3만명에 불과한 캔자스주의 농업도시 가든 시티에서는 시위에 참가한 농업 노동자의 수가 3,000명이나 됐다고 한다.
미국 도살·정육 업계는 중남미계 노동자들이 시위에 참가하는 바람에 생산이 급감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텍사스주 휴스턴에서는 “불법이민자 집에 불지르자”는 전단이 나돌아 주민과 이민자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음을 엿보였다.

시민권운동으로 확산될 우려커
시위 참가자들은 대부분 USA라는 글자가 새겨진 흰색 셔츠를 입었다. 또 머리에 미니 성조기를 꽂거나 대형 성조기를 몸에 두르고 나왔다. 미국을 사랑하며 미국인의 하나로 인정받고 싶다는 의미였다.
특히 최근 이민법 관련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멕시코 등 출신 국가의 국기를 들고 나와 의회와 미국인들의 반발을 초래한 점을 의식한 것이다. 물론 이날도 고국의 국기를 들고 나온 시위자들도 있었다.
이민자들의 존엄을 위한 행동의 날이란 구호아래 수도 워싱턴을 비롯해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를 포함해 100여 곳에서 멕시코계 히스패닉을 중심으로 아시아계와 중동계, 종교·인권단체 등이 대거 참석했다.
이날 시위 양상이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처럼 시민권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도 연출됐다.
불법체류자 시민권 부여법안을 주도하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은 워싱턴기념탑 앞 집회에서 “마르틴 루터 킹 박사는 미국 전역에 자유가 울리도록 부르짖었다”며 “이민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우리의 이민 미래에 대한 지지를 위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일 때”라고 연설했다. ‘국민어젠다를 위한 조지아주 연대’ 소속인 제임스 오린지 목사도 이날 이민자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와 행진이 킹 목사가 이끈 시민권 운동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워싱턴 집회에 참석해 이민자를 적극 옹호하고, 기자들에게 "이건 시민운동의 부활"이라고 말한 까닭은 히스패닉의 정치적 힘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상당수 공화당 상원 의원이 센센브레너 법안을 반대하는 것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한 히스패닉을 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워싱턴 집회엔 한인 100여 명도 참석했다. 하지만 히스패닉이 인산인해를 이룬 상황에서 한국 교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해양기상청에서 일한다는 권모(51)씨는 "미국에서 30년을 살았지만 히스패닉의 응집력이 이렇게 큰지 몰랐다"며 "의회가 그들의 목소리를 함부로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인구의 힘! 미국을 흔들다
히스패닉 파워의 원천은 무엇보다 폭발적인 인구 신장에 힘입고 있다. 2004년 전체 인구 2억 1,200만 명 중 4,130만 명으로 14.1%를 차지,12.2%에 머무른 흑인을 제치고 제2 인종으로 부상했다. 같은 해 7월을 기준으로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백인이 0.8% 늘어난 반면, 히스패닉은 4배가 넘는 3.6%의 폭발적 신장세를 기록했다.
영어는 ‘진공청소(vacuum)’ 한마디나 고작 내뱉던 이들이 어느 날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반이민법 시위를 계기로 거대한 히스패닉 이민 사회가 완전히 눈을 떴다는 분석 기사를 냈다. 그동안 인구가 적은 아시아계 이민자보다 정치적 영향력이 작았던 이들이 이민법 논란을 거치면서 ‘제2의 민권운동’으로 키워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걸출한 지도자는 아직 없지만 자신들의 처지를 “흑인 노예와 같다.”고 절규하는 히스패닉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이민법 개정 요구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상원 법사위에서 친이민법 통과를 추진했던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도 10일 워싱턴 집회에서 “반세기 전 흑인 민권운동을 떠올리게 한다”고 감격해했다. 정·관가 진출도 이미 어느 정도 진전돼 있다. 앨버토 곤살레스 법무장관, 칼로스 구티에레스 상무장관, 헥터 바레토 중소기업청장 등 현직 장관급만 3명이다. 특히 안토니오 비아라이고사 로스앤젤레스 시장은 반이민법 시위에 강력한 지원군이 되고 있다.
상원에서의 부결 사태는 이민 노동자들을 들끓게 했다. 5년째 플로리다주의 뙤약볕에서 토마토를 따고 있는 멕시코계 리고베르토 모랄레스(25)는 “우리는 일하러 왔을 뿐”이라며 “범죄자가 아니다.”고 흥분했다. 그는 의회가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며 애써 분노를 삭였다.
분노는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표출될 가능성이 높다. 히스패닉의 투표율이 크게 올라갈 전망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로스앤젤레스 이민자권리 단체의 앤젤리카 샐러스는 “앞으로 거리의 함성을 어떻게 투표로 전환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히스패닉의 40%만이 투표권을 갖고 있다. 20% 정도는 불법체류자여서 투표할 수 없고, 33%는 아직 어려서 투표할 수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 선거에서 이들이 투표한 경우는 절반에 못 미친다. 그러나 이 점이 바로 이들의 정치적 잠재력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2004년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승리한 뉴멕시코주의 경우, 인구의 43%가 히스패닉이지만 투표권자는 16%에 불과했다. 만약 시민권을 획득하는 자가 늘어난다면 부시 대통령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따라서 불법체류자들이 점진적으로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허용한 친이민법을 공화당 일부가 저지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공화당 아성인 텍사스주나 애리조나주도 히스패닉이 20∼30%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투표권자는 9.6%와 6.2%에 머물러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밖에 네바다, 콜로라도, 플로리다, 유타주 등에서 부시가 승리했지만 히스패닉 유권자가 10%를 넘는다고 전했다. 또 민주당과 공화당의 박빙 지역들은 아주 적은 히스패닉 주민도 표를 결집시킬 경우 캐스팅보트를 쥐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민자 운동을 이끄는 단체들은 6월 밀워키에서 전미 콘퍼런스를 계획하고 있다. 노동절을 맞아 대규모 보이콧도 준비하고 있다. 학교에도, 일터에도 안 나가 ‘이민자 없는 하루’로 본때를 보여줄 심산이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분산돼 있다. 킹 목사도, 지난날 서부 농장 노동자를 조직한 멕시코계 케사르 차베스 같은 인물도 없다. 흑인 민권운동은 흑인 대학과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구심점이었다. 이번 워싱턴 집회만 해도 60개 이상 단체가 제각각 참여했다. 지역 커뮤니티, 노조, 사회단체, 스페인어 방송 등이 총망라돼 한마디로 풀뿌리 네트워크에 의존한 시위였다.
시민권 획득이라는 ‘장기전’에 큰 약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남서부 투표자 교육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안토니오 곤살레스는 “우리의 ‘화력’은 젊은이들”이라며 “미국에서 태어난 수백만명의 라티노가 18세가 되는 날을 고대하라.”고 말했다.
불법체류자 부모는 투표권이 없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헌법에 보장된 속지주의 때문에 시민권자로 이 나이가 되면 투표권이 주어진다. 공화당 일부에서 속지주의를 희생해서라도 불법이민 자녀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유다.

기업들 “히스패닉 모셔라”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의류업체 ‘갭’은 히스패닉계 경영학석사(MBA) 출신과 재학생 모임인 ‘NSAMBA’에 재정 지원을 하고 있다. 히스패닉 고객들의 취향을 꿰뚫어보는 인재 확보도 확보지만, 미래의 히스패닉 재목들과 관계를 돈독히 해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는 한편, 장기적인 매출 증대도 꾀하는 것이다. 화장품 회사 셰브론이 히스패닉계 구직 네트워크로 유명한 ‘소모스(somos)’의 스폰서를 맡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 기업들이 이렇듯 히스패닉에 구애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구매력, 특히 급격히 늘어나는 청소년 소비자의 팽창을 염두에 둔 결과다. 미국 내 히스패닉 주민의 절반이 27세 이하라는 통계가 있다. 지금 10대가 결혼해 아이를 낳는 2050년쯤 백인은 전체 인구의 절반 아래로 떨어진다는 경고도 나와 있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히스패닉을 결코 홀대할 수 없는 셈이다.
이들의 구매력은 2003년 8,000억달러(약 80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들의 19%가 컴퓨터를, 30%가 개인 휴대전화를 갖고 있어 구매력도 백인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1990년대 초 체결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영향으로 이 시장은 중남미 진출을 타진하는 기업들의 생존력을 시험하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히스패닉만을 위한 유선방송은 히스패닉의 동질감을 확인하고 고취하는 수준에서 한발 나아가 중남미 시장을 겨냥한 드라마를 제작, 역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을 미국 기업들이 놓칠 리도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업은 물론 주정부 차원에서도 스페인어를 권장하는 곳이 늘고 있다. 제2 언어 대접을 받고 있으며 ‘스팽글시’란 ‘교통어(Lingua Franca)´가 등장한 것도 오래 전 일이다. 뉴멕시코주와 마이애미시는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퓨히스패닉 리서치 센터에 따르면 워싱턴 주변 310만 명의 노동자 가운데 30만 명이 불법체류자다. 통계는 없지만 히스패닉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들이 일순간 이 일자리를 포기한다면 건물의 51%가 쓰레기 더미에 파묻힐 것이며, 건설 현장의 31%가 작업을 못하게 될 것이고, 식품점과 식당의 22%는 문을 닫게 된다.
급증하는 히스패닉 인구는 허드렛일자리에서 저숙련 백인 노동자를 쫓아낸 데 이어 숙련 노동자로 옮아가는 추세라고 일간 USA투데이가 11일(현지시간) 지적했다. 경제정책연구센터(CEPR)는 외국에서 변호사와 의사·회계사 등을 수입할 경우, 미국으로선 한해 2,700억달러를 절감하는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예측했다.

美재계 “反이민법 제정 반대”
미국 의회의 반 이민법 제정 움직임에 대해 재계의 반대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4월12일(현지시간) 산업계에 따르면 의회가 안보논리를 이유로 불법 체류자의 미국 내 거주를 제한하는 법안을 강행하고 있는데 대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위원, 워싱턴 싱크탱크 연구원들이 경제논리를 내세워 반 이민법 제정을 비판하고 나섰다.
재계는 현재 실업률이 4.7%에 머무는 등 사실상 완전고용을 실현하고 있는 상태에서 불법 근로자들을 추방해 버리면 당장 노동력과 인력이 부족해 임금과 물가상승을 부채질하는 등 미국 경제를 망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계적인 호텔체인인 메리어트의 메리어트 주니어 CEO는 “테러와의 전쟁을 펼치고 있는 미국이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이민자들을 규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우리는 자신과 가족들의 더욱 나은 생활을 위해 일하는 이민자들에 대한 개방정책을 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일손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비즈니스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현재 미국에는 1,200만 명에 이르는 불법체류자들이 있으며 이중 피고용자는 700만명에 이른다. 이는 미국 전체 근로자의 5%에 달하는 것이며, 농업과 청소업의 경우 이들 불법 근로자의 비중이 각각 24%, 17%를 차지하고 있다. 전미요식업 협회의 존 게이 로비스트는 “미국에서 음식점을 차린다면 접시닦이, 보조요리사, 웨이터, 배달부 등이 필요한데 이들의 대부분은 이민자들”이라고 말했다. 또 브루킹스연구소의 오드리 싱어 연구원은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가금류나 쇠고기를 포장하는 공장 종업원이 미국 사람들이었으나 지금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를 대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학생수 초과, 의료보장 등 불법 이민자들로 인해 사회적 비용부담이 가중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에는 세금을 내는 이민자들이 더 큰 혜택을 가져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댈러스 연방준비제도은행의 리처드 피셔 총재도 “정치 지도자들은 불법이민 반대조치가 가져올 경제적 부작용에 대해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며 의회 입장에 반대의사를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