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신도시 ‘화성’ 완공

나라를 개혁하려 했던 정조대왕의 꿈을 위한 하나의 역사적 시발 사전

2017-09-04     신혜영 기자

[시사매거진 233호 / 신혜영 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인 ‘화성(華城·현재의 수원)’이 2년 반 동안의 공사 끝에 1796년 9월 10일 완공됐다. 화성은 정조정조(제22대, 재위 1776~1800) 18년(1794)부터 20년(1796) 사이에 좌의정 채제공의 주관 하에 축성,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거중기 따위 기계 장치를 활용하는 등 우리나라 성곽 건축 기술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의 백미로 꼽히는 건축물로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성의 총길이는 4,600보(5,743m)로 서양식 축성법을 채용했고 재료도 대형벽돌을 사용했다. 당대의 모든 과학 기술과 역량이 동원된 이 성은 다산 정약용이 거중기(擧重機)를 이용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하고 감독했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이유에 대해 벽파세력의 압박을 피해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화성 천도설’이 있긴 하지만, 당쟁에 휘말려 비운에 간 아버지 세도세자를 추모하고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자신의 비원을 실현할 목적으로 건설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정조는 화성 건설과 함께 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로 옮겼고, 통일신라 때 창건된 갈양사를 용주사로 이름을 바꿔 사도세자의 능사(陵寺)로 삼아 아버지의 넋을 위로했다.

정조는 신도시의 번영을 위해 한성부내의 재력 있는 시전도매, 기타 부호들과 개성, 평양, 의주, 동래의 거상들로부터 이주 신청을 받았는가 하면, 장사에 능하고 근면 성실한자 20인을 골라 계를 짜게 하고 이 계원들에게 관모와 가삼의 국내매매와 대중국 무역을 독점하게 했다. 정조의 이런 강력한 의지는 인가(人家)라고 해야 불과 5~6호에 지나지 않았던 삭막했던 들판을 1900년에 약 2,000호의 큰 읍으로 발전시켰고, 이 신도시는 2015년 현재 인구 118만여 명인 대도시로 성장했다.

다른 한편으론 ‘발상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근본적으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정조대왕이 자신의 거창한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하나의 역사적 시발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을 일순간 공포로 몰아넣은 9.11테러

2001년 9월 11일 오전 7시59분 92명의 승객을 태운 아메리칸 항공 소속 AA11편이 보스턴을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날아올랐다. 이어 8시1분 45명을 태운 유나이티드 항공의 UA93편이 뉴저지주에서 샌프란시스코로, 8시14분 65명을 태운 유나이티드 항공의 UA175편이 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9시 64명을 태운 아메리칸 항공의 AA77편이 워싱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각각 향했다.

오전 8시45분. 아메리칸항공 소속 AA11편이 미국 뉴욕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가운데 북쪽 건물과 충돌한다. 이어서 9시3분 유나이티드항공의 UA175편이 남쪽 건물을 들이받는다. 9시40분에는 AA77편이 위싱턴의 국방부 건물과 충돌하고 이어 9시50분에는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이 붕괴된 뒤, 이어서 10시3분 UA93편이 피츠버그 동남쪽에 추락한다. 10시29분에는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고, 이 여파로 17시25분 47층짜리 세계무역센터 부속건물인 7호 빌딩도 주저앉았다.

세계 경제의 중심부이자 미국 경제의 상징인 뉴욕이 하루아침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9.11테러는 90여 개국 2,800~3,500여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CNN 방송망을 타고 시시각각으로 사건실황이 전세계에 생중계되면서 세계 역시 경악했다. 그러면서 국제금리가 단숨에 하락하고 세계 증권시장들이 크게 흔들렸다. 미국은 사건 직후 일주일간 증권시장을 열지도 못하였으며, 미국을 오가는 모든 국제 항공선도 차단되었다. 미국인들은 이 사건을 일컬어 ‘제2의 진주만 공격’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미국 건국 이래 본토의 중심부가 외부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4대의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266명 전원 사망, 워싱턴 국방부 청사 사망 또는 실종 125명, 세계무역센터 사망 또는 실종 2,500~3,000명 등 정확하지는 않지만 인명 피해만도 2,800~3,500명에 달한다. 경제적인 피해는 세계무역센터 건물 가치 11억 달러(1조 4300억 원), 테러 응징을 위한 긴급지출안 400억 달러(약 52조 원), 재난극복 연방 원조액 111억 달러(약 52조 원) 외에 각종 경제활동이나 재산상 피해를 더하면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납치당한 4대의 항공기에는 3~5명의 납치범들이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미국연방수사국(FBI)의 조사 결과 범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출신의 조종사들로 알려졌다. 미국은 용의자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인 알 카에다를 지목했다. 미국은 같은 해 10월 7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기지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한다.

 

[1251년 9월 25일] 세계 속에 피어난 아름다운 경판 팔만대장경

1251년 9월 25일은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라고도 불리는 팔만대장경 조성이 완료된 날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이 경판은 고려가 원나라의 침략에 맞서 종교적인 염원으로 국란을 극복하고자 만든 불교 목판경으로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8만 4000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경판의 개당 총 길이는 68㎝ 혹은 78㎝이며 폭은 약 24㎝, 두께는 2.7~3.3㎝의 범위이다. 무게는 경판의 재질에 따라 4.4kg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3∼3.5㎏ 정도이다. 경판의 재질은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다.

고려 현종 때에 초조(初雕) 대장경이 만들어졌으나 몽골의 침공으로 불타 없어졌고 선종 때에 대각국사 의천이 속장경을 간행하였으나 이 또한 몽골의 침공으로 불타 없어졌다. 그 후 1236년 몽골의 침공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팔만대장경이 강화에서 조판되었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최씨 무신 정권은 먼저 대장도감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고 온갖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새길 때마다 절을 세 번씩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천만 개의 글자가 하나같이 그 새김이 고르고 잘못된 글자가 거의 없다.

일본은 고려 말에서 조선 중종 때까지 80여 회에 걸쳐 대장경판을 요청한 바 있으며 그 결과 경판 대신 종이에 인쇄된 60여 본이 일본 측에 기증, 고려대장경은 일본 대장경의 모체가 되었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8만 1258장으로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하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의 대장경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팔만대장경은 강화도에 보관되었던 것을 조선 태조 7년(1398년) 서울 지천사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만대장경은 글씨가 아름답고 오탈자가 전혀 없어 현존하는 3000여 종의 한역 장경 가운데 가장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아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97년 9월 5일] 빈자(貧者)의 성녀 세상에 잠들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헌신한 테레사 수녀가 1997년 9월 5일 인도 캘커타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에서 87살을 일기로 타계했다. 테레사 수녀가 타계하자 전 세계는 인류사에 진정한 사랑을 실천한 성녀의 영면을 기원했다. 테레사 수녀의 장례식은 엿새 뒤인 9월 13일 거행되고 유해는 ‘사랑의 선교회’ 구내 묘지에 묻혔다.

1910년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부모에게서 태어난 테레사 수녀(본명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는 18살에 고난의 길로 들어선 뒤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수녀생활을 하며 극빈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928년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에 들어간 뒤 인도 국적을 취득하고 캘커타의 빈민가에 살면서 센트메리고등학교의 교사와 교장을 역임했다. 그녀가 1950년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는 지구촌 120개 나라에 4,400여 명의 수녀와 평수사 등을 보내 장애인과 고아, 에이즈환자 등을 돌보고 있다. 테레사 수녀가 세운 병원과 구호시설이 인도에만도 168곳이 있으며 전 세계에 517곳에 이른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상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납했고 교황이 선물로 준 차도 팔아서 나환자수용소를 짓는 데 썼다. 테레사 수녀는 선교회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설립 승인을 받은 뒤 총장을 마더(Mother)로 호칭키로 한 회헌에 따라 그 뒤 ‘마더 테레사’로 불렸다. 그녀는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한 구호,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아 여전히 전세계에서 ‘빈자의 성녀’로 추앙받고 있다.

한편, 가톨릭교회는 인도 여성 모니카 베스라의 복부 종양이 치유된 것을 테레사 수녀가 일으킨 기적으로 공인하여 故 테레사 수녀는 2003년 10월 시복식에서 성자 바로 아래 단계인 복자로 서품되었다.

[19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 옥중에서 순국

1920년 9월 28일 오직 내 나라의 독립만을 위하여 불꽃처럼 살다 간 순국열사 유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1915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에 편입했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했다. 1919년 이화학당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총독부 임시휴교령에 따라 학당이 휴교하자 유관순은 고향인 충청남도 천안으로 내려와 조인원, 이백하 등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기 시작했고, 4월 1일 아오내[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중권(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다. 그녀는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영명학교(永明學校)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관옥(寬玉)을 만났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항소했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했다. 그는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하다는 것을 끝까지 항변하며 의자를 집어던졌고 그로 인해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몸이 상했으나 복역 중에도 독립만세를 고창했고, 이 때문에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악화되어 17세의 나이로 못다 핀 꽃봉오리 같은 삶을 옥중에서 마감했다.

8.15광복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1996년 5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했다. 유관순 열사 추모제는 해마다 10월 12일에 열렸는데, 2005년부터 매년 9월 28일에 열사 순국일 행사가 열리게 되었다. 충남 천안시 사적관리소는 독립기념관 및 독립운동사 연구학자들의 연구 결과, 유 열사 순국일이 9월 28일로 밝혀져 추모제 날짜를 바로 잡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앞서 독립기념관은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유관순 열사가 석방 이틀을 앞둔 1920년 9월 28일 고문으로 얻은 병이 악화돼 서대문형무소 감방 안에서 순국’한 사실을 확인했다.

 

[1862년 9월 22일]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 ‘노예해방 예비선언’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1809~1865)이 앤티담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자 이튿날 1862년 9월 22일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여러 주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였으며, 자치주가 이에 응하지 않자, 링컨은 1863년 1월 1일 흑인노예의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로써 약 1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자유를 얻었다. 링컨은 이 선언을 통해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한다고 밝힌 뒤, 해방된 흑인들에게도 옛 주인들에 대한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이외에도 흑인들의 연방 군대 입대를 허용했다. 이 선언은 내전에서의 전략적 의미도 지녔는데, 그것이 노린 것은 남부의 사기저하와 남부 여러 주의 연방 조기복귀를 노리는 것이었다. 더욱이 흑인을 북군 병력에 흡수할 수 있게 됨으로 북군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노예해방 선언 이후 흑인들이 북군에 입대해 남군과 싸웠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링컨이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바로 이 노예해방선언 때문일 것”이라고 했듯이, 후세의 역사도 그의 바람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인도적인 명분에서 출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단지 미연방의 대통령으로서 미연방을 수호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전쟁을 결심했고 선언을 발표했을 뿐, 노예해방은 단지 부수적인 산물이었을 뿐이었다. 노예해방의 실현은 북부의 산업 자본가와 남부 대지주 사이의 경제적 이해대립이 전쟁으로 폭발한 뒤에야 형식적으로 이뤄진 셈이다.

이 선언으로 북부인들은 자유와 인권과 같은 미국 독립 전쟁 때와 같은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이러한 미국인들의 이상주의적 경향은 청교도적인 명백한 운명 같은 이상주의 성향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때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 의해 다시 한 번 보여주게 된다) 또한 이 선언은 유럽 열강이 남부 연맹의 독립을 승인하려던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39년 9월3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3국 조약을 근간으로 한 추축국 진영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다.

독일은 1940년 6월 프랑스를 점령하고 이어 1941년 6월 소련을 침략, 독소전을 일으켰으며 그 사이 이탈리아는 이집트를 침공한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 중·일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은 1940년 9월 독일·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체결하고, 1941년 12월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 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3국 동맹에 따라 독일·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발해, 전쟁은 바야흐로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초기에 승리를 거두던 동맹국은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차츰 열세에 몰리게 되어 1943년 9월에 이탈리아가, 1945년 5월에 독일이 각각 항복했다. 1945년 8월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으로 참가국은 연합군 측 49개국, 동맹국 측 8개국이며 동원병력 1억 1,000만 명,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냈다. 이 전쟁으로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도 커다란 변동이 나타났다.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24일 국제연합이 창설되었으며 전후 경제 질서의 회복을 위해 1944년 체결된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달러가 세계의 기축 통화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미국 중심의 경제체제가 성립됐다. 소련 군대가 주둔한 동유럽, 외몽고, 북한 등에 공산주의정권이 들어섰고, 중국에서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세계는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동유럽,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으로 재편되는 이른바 냉전시대가 시작되었다. 또한 1960년대까지 패전국의 지배 아래 식민지 상태에 있던 나라들도 상당수가 주권국가로 독립을 이루면서 국제 관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1972년 9월5일] ‘검은 9월단’ 올림픽 선수촌 테러

1972년 9월5일 뭰휀 올림픽 경기가 중반을 넘어서던 즈음, 뮌헨 올림픽을 피로 물들인 ‘검은 9월단’ 사건이 일어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의 테러단체인 ‘검은 9월단’의 게릴라들이 이스라엘 선수단의 숙소에 자동소총을 난사하며 침입했다. 역도 코치와 레슬링 코치가 게릴라들의 총탄을 맞고 바로 숨졌다. 이들은 9명의 이스라엘 선수를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억류 중인 234여 명의 검은 9월단 단원들과 서독 정부가 체포해 수감 중이던 바더 마인호프 그룹(속칭 서독적군파)의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와 울리케마인호프(Ulrike Meinhof)의 석방을 요구하고 자신들이 안전한 이집트행을 요구했다. 이들은 납치 과정에서 사살한 레슬링 코치 모세 와인버그(Moshe Weinberg)의 시체를 문밖에 버려 자신들의 의지를 과시했다.

검은 9월단 단원들은 인질들을 끌고 이집트 카이로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 편으로 푸르스텐펠트브루크(Furstenfeldbruck) 공항으로 갔다. 이 공항에서 서독 경찰이 비행장에서 구출작전을 폈지만 검은 9월단 단원 5명과 경찰 1명, 이스라엘 인질 9명 전원이 현장에서 숨졌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텔레비전으로 시종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테러 전담 특수부대’란 개념은 어느 나라에도 없었고 당연히 이런 경우에 대비한 특수 훈련이란 개념도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올림픽대회가 24시간 동안 중단돼 올림픽 사상 최악의 사태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