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통치 치욕의 역사, 영원히 사라지다

일재 잔재 철거와 민족정기 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철거된 구 총독부 건물

2017-08-16     신혜영 기자

[시사매거진 232호=신혜영 기자]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5만여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의 상징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 돔 첨탑이 대형기중기에 의해 해체됐다. 총독부 건물은 이후 소장 유물을 옮기는 작업을 거친 뒤 이듬해 6월부터 12월에 걸쳐 말끔히 철거됐다. 일제가 1926년 경복궁 근정문 앞에 총독부 건물을 세움으로써 훼손됐던 경복궁의 위용이 70년 만에 제 모습을 찾게 됐다.

[1995년 8월 15일] 옛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1916년에 공사를 시작해 1925년에 완공된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으로 우리 민족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총 본산으로서 사용됐다. 해방 후 1948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서울의 랜드마크이자 중앙행정관청으로 쓰이다 제3공화국 시절 중앙행정부서가 성루 세종로 종합청사와 과천청사 등으로 이전하면서 1986년부터는 23개의 전시실을 갖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오랜 기간 중앙청 건물은 “일제식민통치의 치욕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로 철거가 마땅하다”, “동양에서 건립된 근대서양식 건물 중에서 르네상스 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걸작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철거와 보존을 둘러싸고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여하는 첨예한 찬반대립의 공방전을 벌이다 1993년 완전해체 및 철거가 결정되었다. 그 후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던 1995년부터 철거된 중앙청 건물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당시 정부는 “과거의 아픈 기억도 보존할 가치가 있으며, 비록 조선총독부 건물로 지어지긴 했으나 그 안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도 만들어져 왔다”, “치욕의 역사라고 해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증거이기에 이전을 해서라도 역사적 교훈의 장소로 삼아야 한다”는 여러 반론들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재를 철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겠다”는 명분 아래 철거했다.

제일 먼저 철거된 지붕 첨탑과 일부 철거 부자재들은 현재 천안의 독립기념관 야외에 자리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에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1610년 8월 6일] 한방의서 ‘동의보감’ 완성

 

‘동의보감’은 선조 30년(1597) 임금의 병과 건강을 돌보는 어의 허준(1546∼1615) 선생이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에 착수, 광해군 3년(1611년 8월 6일)에 완성하고 광해군 5년(1613)에 간행한 의학서적이다. 금속활자로 발행된 동의보감은 총 25권 25책 2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과학인 ‘내경편’ ‘외형편’ 4편, 유행병·곽란·부인병·소아병 관계의 ‘자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편과 이외에 목록 2편으로 되어있고,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한 체제정연한 서적이다.

허준은 우리 실정에 맞는 의서라하여 ‘동의보감’이라 했으며, 훈련도감자본으로 발행되었다. 동의보감은 중국과 일본에도 소개되었고,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한방의서로 인정받고 있다. 보물 제1085호로 지정되었고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1614년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에 보관되어 있다.

허준은 조선 중기의 의학자로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岩),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1574년(선조 7) 의과(醫科)에 급제하여 이듬해 내의원의 의관(醫官)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임금을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공신으로 추대되었으나 중인신분에 과하다는 여론이 일자 취소됐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한때 파직되었다.

‘동의보감’은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16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한의학의 백과사전격인 책으로 허준 선생은 이외에도 중국의 의학서적을 국역하는 데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울창한 미루나무에 가려 한국 진영 제 3초소가 보이지 않자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그리고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국제연합군 측 제3초소 부근에서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 장교 2명과 사병 수십 명이 나타나 작업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경비병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갑자기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 도끼와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들은 UN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 공격을 가해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미군 대위와 소대장 마크 배럿(Mark Barrett) 미군 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피살되었으며, 이밖에 미군 사병 4명, 대한민국 국군 장교와 사병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고, UN군측 트럭 3대가 파손되었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호’(경계상태 돌입)를 발령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미군은 F-4 전폭기 1개 대대와 F-111 전폭기 1개 대대를 한국에 증파하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한국해역으로 항진시켰으며, B-52 폭격기를 출동시키는 등 전쟁위기에 직면했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자 북한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발생 사흘 뒤인 8월 21일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명의로 국제연합(UN)군 사령관에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사건들이 또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쌍방이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세계 여론의 비난 속에 북한 정부는 ‘유감’을 표명했으며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당시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시행된 것으로 사실상 밝혀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같은 해 9월부터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남과 북의 분할경비로 바뀌었다. 경계 밖 상대편 지역에 존재하던 초소는 철거되었고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과 북은 경계구역을 나눠 높이 1m의 흰색 말뚝 126개를 10m 간격으로 설치됐다.

 

[1936년 8월 9일] 손기정,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1936년 8월9일 제11회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의 2시간 30분 장벽을 깨고 우승했다. 손기정 선수는 땡볕 아래서 4만 2.195㎞ 코스를 2시간 29분19초에 주파하고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아르헨티나의 자발라는 27.4㎞ 지점에서 탈락하고 영국의 어니스트 하퍼(Ernest Harper)가 2위로 들어왔다. 함께 참가한 남승룡 선수는 3위를 차지했다.

손기정 선수는 일제 치하에서 올림픽에 참가해 국적이 일본으로 되어 있었다.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의 가슴에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달려 있었고 이름도 일본식인 ‘기테이 손’으로 불렸다. 영예의 월계관을 쓰고도 나라 잃은 울분과 슬픔을 삭여야 했던 손기정 선수. 하지만 우리 민족의 기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민족의 영웅 탄생에 기뻐하던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5일자에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함으로써 8월 27일부터 4번째 무기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업적과 명성은 국내 못지않게 해외에서 더 높았다. 손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전후를 면밀히 취재한 바 있는 미국의 작가 리처드 만델(Richard Mandell)은 그의 저서 「나치 올림픽(The Nazi Olympics)」에서 “손기정 선수는 어려서부터 민족 독립주의자이며 전후(戰後) 조선 독립 운동의 리더로서도 공적을 올렸다”고 했으며 “손기정과 남승룡은 베를린에서도 기자들에게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려 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당시 손은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공식 서명을 할 때는 모두 한자로 썼으며 그 옆에는 조선 지도를 그려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어디서 왔는가?”라고 물으면 그는 “조선에서 왔다”고, 당시로서는 투옥당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대답을 서슴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로부터 56년 후인 1992년 8월 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또 한 번의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단 황영소가 2시간 13분23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낸 것이었다. 관중석에서 그 현장을 지켜본 80세의 손기정 옹은 눈물을 글썽이며 후배 황영조와 감격의 포옹을 했다.

한편, IOC는 홈페이지의 손기정 자료에서 “그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로서 당시 항상 한국이름으로 서명하고 한국과 일본은 분명히 다른 나라임을 밝히려 애썼다”고 밝히면서 시상식에서 일장기가 올라가고 일본국가가 연주되자 고객를 숙여 침묵으로 항의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당시의 일본국적과 일본이름 ‘기테이 손’ 이름은 역사적 사실이므로 훼손할 수 없다”는 게 IOC의 공식입장이다.

 

[1962년 8월 5일] 마릴린 몬로 사망

1962년 8월 5일 여배우 마릴린 몬로(Marilyn Monroe)가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마릴린 몬로는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극작가 아서 밀러를 포함한 세 번의 결혼실패 등 불행한 사생활의 막바지에 36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1926년 6월 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마릴린 먼로는 어머니 글래디스 펄 베이커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의 이름은 노마 진이었다. 출생신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아버지 마틴 E. 모텐슨은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실제 아버지는 어머니의 직장 동료였던 스탠리 기포드였다. 훗날 먼로는 여러 번 친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딸을 만나기를 꺼려했다. 어린 시절 직장에 다니던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딸을 맡기고 가끔 들러서 그녀를 만나곤 했다. 어머니가 정신분열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수요오딘 뒤에는 어머니의 친구 집에서 생화하다가 고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1942년 6월 19일, 마지막 보호자 그레이스 고다르의 주선으로 노마 진은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했다. 그러나 도허티는 해병대에 입대했고, 혼자 남은 노마 진은 군수공장에서 일하다가 1945년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버를 만나 모델과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1946년 9월 13일 두 사람은 합의이혼을 하고 노마 진은 할리우드로 향한다.

1946년 8월 26일 노마 진은 이름을 마릴린 먼로로 바꾸고, 20세기폭스사와 첫 계약을 맺었다. 초창기 주로 모델로 활동하다 영화 ‘나이아가라’에서 주연을 맡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 전신에서 발산하는 독특한 성적 매력은 그녀를 순식간에 세계적인 섹시 심벌로 올려놓았다.

1954년 먼로는 조 디마지오와 혼인한 후 ‘7년 만의 외출 The Seven Year Itch’(1955년 개봉)을 촬영한다. 잘 알려진 지하철 환풍구 바람에 드레스가 들리는 장면은 마릴린 먼로의 대표적인 관능적이면서도 코믹한 표정을 연출한 장면으로 꼽히고 있다. 1957년 먼로는 메릴린 먼로 프로덕션을 창립하고 ‘왕자와 쇼걸 The Prince and the Showgirl’을 촬영했고 이 작품으로 데이비드 디 도나텔로 상을 수상했다. 1957년 작품인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1959)아’로 골든 글로브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후 ‘부적합자 The Misfits’(1961) 등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1962년 먼로는 개인적인 문제와 투병 생활, 그리고 세간의 비난에 시달리던 중 8월 5일 죽은 채 발견됐다. 검시 결과는 약물 중독이었지만 자살이었는지 타살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먼로의 죽음에 얽힌 갖가지 추측들이 난무하게 됐다.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 이루어진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긴급재정경제명령권을 발동해 금융실명제 실시를 선포한다. 김 대통령은 금융시장의 동요를 막기 위해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국회의 법 개정 절차를 대신했다고 밝혔다. 금융실명제는 이날 오후 8시부터 발효됐다. 이 조처로 기존 계좌 가입자는 반드시 실명확인 절차를 거쳐야 금융거래를 할 수 있게 됐다. 비실명자산 소유자는 두 달 안에 자산을 실명으로 전환하도록 했다.

한국은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국내 저축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 예금주의 비밀을 보장하고 가명·무기명에 의한 금융거래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해왔다. 그러나 차츰 경제가 성장하고 금융거래의 규모가 커지면서, 지하경제를 부추기게 되었고 완전한 종합소득세제 실시가 불가능해졌다.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등 각종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1982년에는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그 폐해가 극에 달했다. 이에 정부는 같은 해 ‘7·3조치’를 발표해 1983년 7월 1일부터 종합과세와 자금출처 조사가 포함된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983년 7월 제정된 ‘금융실명제에 관한 법률’은 핵심사항이 모두 빠진 채 통과되었으며, 실명에 의한 금융거래 의무화 시기도 연기되어 부동산 투기와 저축 감소현상 등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1988년 말 정부는 다시 한 번 금융실명제의 전면적인 실시를 천명했으나 1989년부터 경제가 어려워지자 또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의 기습적인 금융실명제 실시 선언이 있고서야 이 제도가 실행되었다. 실명제의 실시 이후 우려했던 부작용들이 크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실명제의 궁극적 목적인 세금탈세 근절, 검은 돈 흐름의 차단, 지하자금의 양성화 등에 대해 만족할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2000년 8월 12일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 침몰]

2000년 8월 12일 러시아 북해함대 소속 최신예 전략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기동훈련 도중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서 침몰했다. 원인 불명의 폭발음을 남긴 채 해저 108m에 가라앉았다. 이 사고로 잠수함에 타고 있던 승무원 118명이 모두 숨졌다.

침몰 사실은 서방측이 먼저 공개했고 러시아 군 당국은 이틀이 지난 후에야 이를 공식 확인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와 군은 사고가 나지 쉬쉬하기에 바빴다. 사고 당시 러시아 해군은 쿠르스크함과의 통신이 갑자기 두절되자 곧 조사에 착수했고, 동함의 추진력을 공급하던 2기의 원자로가 중지된 채 해저에 침몰하고 있는 것을 사고 다음날인 13일에서야 확인한 것이다. 러시아 해군은 다음 날 “130여 명의 승조원이 탑승한 러시아 전략 핵잠수함 쿠르스크함(오스카급)이 바렌츠해에서 충돌한 뒤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해군은 사고 이틀 후에야 모스크바에 있는 해군사령부에 구조작전본부를 설치하고 항모 쿠츠네쵸프를 비롯하여 잠수함구조함, 수상함, 잠수함 등 22척의 함정을 동원 해 구조작업에 나섰으나 심한 비바람과 높은 파도로 작업을 일단 포기했다가 날씨가 좋아지자 15일 밤터 본격적인 승무원 구출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체 능력으로 구조가 어려워지자 러시아는 나흘 만에 노르웨이와 영국의 심해 구조팀의 지원을 받았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은 러시아에 공식적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조사를 요구했지만, 러시아 측은 쿠르스크호를 침몰시켰을지 모를 서방국과의 진상규명을 거부했다. 쿠르스크함의 침몰원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정확한 원인이 발표되지 않고 있다. 사고가 난 뒤 한 달 후 러시아 의회 사고 조사반이 “쿠르스크함이 핵순양함 포트르함이 오발한 어뢰에 맞아 침몰한 것 같다”고 밝혔지만 아직도 러시아의 공식 표명은 없는 상태다.

쿠르스크호는 항공모함 추격과 격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길이 154m, 폭 9m, 배수량 1만 3,000톤의 신형 잠수함으로 최대 24기의 핵미사일을 탑재하고 수심 500m에서 120일간이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신형 오스카급 전략 핵잠수함이었다. 1994년 건조되어 1995년 취항했다.

 

[1944년 8월 23일] 일제, 여자정신근로령 공포

1944년 8월 23일 일본 후생성은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 시행한다. 만 12세부터 40세 미만의 여자에게 영장을 교부해 정신대로 편성한다는 내용의 법이다. 일제는 이미 1932년부터 군대위안부제도를 도입한 이후 1937년 난징대학살을 계기로 본격화한 것을 결국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으로 합법화한 것이다.

동원 방법은 관청의 알선, 공개 모집, 자발적인 지원, 학교나 단체를 통한 선전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동원된 여성들은 무조건 노무 제일선에 끌려갔으며, 각종 공사장에서의 단순노무, 전선기지에서의 사무직 등에 종사했다. 그러나 노무동원은 표면상의 구실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일본군의 현지 위안부로 희생되었다. 군과 결탁한 매춘업자들이 이들 중 다수를 종군위안부로 투입했기 때문에 여자정신대는 곧 종군위안부를 뜻하게 되었고 현장을 ‘위안소’로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제가 징발해간 한국 여성은 20만여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