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새정치 바람몰이 하며 국회 입성

모호한 새정치 개념 정의, 오락가락 행보 고치는 것이 과제

2013-05-10     지유석 기자

이변은 없었다. 4월24일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노원병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안철수 의원이 새누리당의 허준영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며 국회입성에 성공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의 국회입성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이 같은 전망이 무색하게 60%를 넘는 투표율을 얻었다. 안철수 현상은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안철수 의원이 정치무대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점은 2년 전인 2011년이었다. 이즈음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생들의 잇다른 자살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던 시점이었다. 

안 의원은 ‘시골의사’로 잘 알려진 박경철 원장과 함께 전국 25개 도시를 순회하며 청춘콘서트를 진행했다. 그는 청춘콘서트를 통해 이 시대 청년 학생들의 사회경제적 고민과 실존적 고뇌에 진심으로 반응했고 이를 경제민주화, 복지, 교육, 노동 등의 쟁점으로 승화시켰다. 이 같은 행보는 당장의 생활고와 미래의 취업난으로 불안해하는 젊은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던졌고 젊은이들의 멘토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기성정치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도 안 의원의 행보에 주목했다. 계파정치, 보스정치가 만연한 정치 풍토로 인해 자신들의 요구가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불만감에 차 있었던 이들은 안 의원을 변화에 대한 열망을 실현시켜 줄 대안으로 여겼다. 이런 젊은이들과 무당파층의 정서는 이른바 ‘안철수 현상’의 근간이 됐다. 

안철수 현상이 현실 정치에 투영된 건 2011년 치러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였다.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간판이라 할 수 있는 나경원 최고의원을 후보로 내세웠다. 반면 야권에서는 마땅한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 안 의원은 청춘콘서트 자리에서 서울시장 후보 출마 의사를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여론은 이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안 의원이 처음 서울시장 출마의사를 밝힌 시점은 2011년 9월이었다. 그는 이즈음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나라가 너무 전시행정적이고, 서울시를 포함해서 우리나라 전체 소프트웨어가 업그레이드 돼야 진짜 선진국이 된다”고 밝혔고 이 발언은 서울시장으로서의 포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됐다. 출마는 자연스럽게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발언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안 의원의 지지율은 50%선을 가볍게 뛰어 넘었다. 하지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안 의원은 출마보다 ‘킹 메이커’를 선택한 것이다. 

안 의원의 선택은 박원순 현 서울시장이었다. 당시 박원순 후보는 시민사회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중앙 정치무대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지지율도 5%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안 의원의 선택은 그의 입지를 단숨에 반전시켰다. 

안 의원은 박 후보와 대화를 나눈 후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이때 걸린 시간은 단 17분. 그러나 이 시간은 박 후보에게 날개를 달아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박 후보는 안 의원의 지지에 힘입어 나경원 후보를 12%차로 누르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진정한 승자는 안철수였다. 이 선거를 통해 그는 유력한 대권후보로 떠올랐다. 

정치권은 안철수의 부상에 긴장하는 눈치였다. 특히 여권의 견제심리는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다. 강용석 前 의원이 저격수 역할을 자처했다. 강 前 의원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안 의원이 안랩에서 고액의 배당금을 챙겨왔다’고 주장했다. 보궐선거 후인 11월 국회 지식경제위는 안철수연구소에 배정된 14억 규모의 정부출연예산을 삭감하기로 결정했다. 이 조치는 민주당의 반발로 철회됐지만 정치권은 견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2파전에서 3파전, 다시 2파전으로

2012년 대통령 선거가 임박하면서 안 의원의 행보는 초미의 관심을 끌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각각 박근혜와 문재인을 후보로 내세우고 일찌감치 대선 체제에 돌입했다. 하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도 대통령 선거가 ‘박근혜 대 문재인’ 양자 구도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다. 여야 공히 어느 시점에서 안 의원이 출마를 선언할 것으로 보았다. 문제는 출마선언이 이뤄지는 시점이었다.  

안 의원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그의 모호한 발언에 다양한 해석과 추측이 난무했다. ‘안철수의 생각’을 출판한 2012년 7월 출마가 유력하게 점쳐졌다. 그는 자신의 책 서문에 ‘도전은 힘이 들 뿐 무서운 것이 아니라며, 더 많은 사람들과 힘을 모아 나가고 싶다’고 밝혔고, 이 대목은 대선 출마를 강력히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뒤이은 행보는 이 같은 해석이 틀리지 않았음을 뒷받침했다. 그는 신간 출간 이후 박원순 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서대문구 사회복지사, 충남 홍성의 농민 등 각계각층의 인사와 활발히 접촉했다. 결국 9월19일 안 의원은 “이번 18대 대선에 출마하겠다. 제게 주어진 시대의 과제를 감당하겠다”면서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안 의원의 출마선언으로 18대 대선 레이스는 박근혜-문재인-안철수 3자 구도로 펼쳐지는 듯 했다. 하지만 ‘정권교체’와 ‘단일화’라는 최대 쟁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명박 前 정권이 저지른 실정으로 인해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은 하늘을 찔렀다. 이를 의식한 듯 여당인 새누리당은 전 정권과의 선긋기에 전력투구했다. 그나마 박근혜 후보의 경쟁력이 야권 후보들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위안거리였다. 

보수 지지층은 박근혜 후보를 축으로 강하게 결집하기 시작했다. 보수층의 결집은 야권을 긴장시켰다. 야권은 1987년의 악몽을 떠올렸다. 당시 김대중-김영삼 후보는 난항 끝에 단일화에 실패했고 결국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했다. 야권 지지층 사이엔 87년의 실패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됐고, 이 같은 공감대는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는 여론으로 진화해 나갔다.

단일화 협상은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정치력을 시험하는 시험대였다. 양 후보는 치열한 탐색전을 벌였다. 안 후보 측은 민주당에 쇄신을 요구했고 문 후보 측은 “안철수 후보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모두 이길 자신이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단일화 협상은 매끄럽지 않았다. 두 후보 측은 단일화 방식을 놓고 이견을 드러냈고, 견해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안철수 캠프 측 박선숙 대변인이 한밤중에 기자회견을 자청해 격앙된 어조로 문 후보 측에 최후통첩을 보내는 상황까지 연출됐다. 단일화 협상이 물 건너 간 것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안 후보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11월23일 “단일화 방식은 누구의 유불리를 떠나 새정치와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의 뜻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후보와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면서 전격 사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제 단일 후보는 문재인 후보”라고 한 뒤 문 후보에게 성원을 보내줄 것을 당부했다. 

안 후보의 사퇴 소식에 지지자들은 허탈감을 금치 못했다. 안철수 지지층의 대거 이탈 여부가 선거 막판 변수로 떠오르기까지 했다. 안 의원은 문 후보의 유세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던 12월19일 안 후보는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이로서 안철수 현상은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안철수의 승리는 ‘안철수 현상’의 승리

대선 이후 정권교체를 바랐던 유권자들은 이른바 ‘멘붕(멘탈붕괴)’에 빠졌다. 박근혜 후보는 청와대에 입성했고, 이후 아버지인 박정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사들로 주변을 채웠다. 한편 제1야당인 민주당은 대선 패배 충격과 당권 싸움에 골몰해 존재감을 잃어갔다. 이 와중에 안철수의 존재도 희미해져갔다. 변화를 바라는 열망도 함께 사라지는 듯 했다. 

보수 논객들은 안철수의 대선후보 사퇴시점부터 안철수 현상은 끝났다고 못 박았다. 대표적인 보수논객인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은 대선 9일전인 12월10일 자신의 칼럼을 통해 “이제 ‘안철수 현상’은 죽었다”고 썼다. 

이때 안철수는 또 한 번의 반전 드라마를 연출했다. 노회찬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공석이 된 노원병에 무소속 후보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원병 출마선언은 다소 의외였다. 노회찬 의원의 의원직 상실은 ‘삼성 X파일’ 유출에 대해 대법원이 유죄판결을 내린데 따른 결과였다. 노 前 의원은 진보세력의 간판 스타였고, 그의 의원직 상실은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비쳤다. 이에 진보세력은 보궐선거를 통해 현 정권을 심판한다는 복안을 마련했다. 이런 판세에 노원병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안철수가 끼어들었으니 진보세력으로선 달가울 리 없었다. 

노 前 의원의 소속당인 진보정의당의 이정미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정치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뜻을 수렴하고자 정치복귀를 하신다는 것은 환영한다”면서도 “정치복귀의 첫 번째 선택지가 노원병이라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천호선 진보정의당 최고위원도 자신의 트위터에 “안철수 씨가 노원병 보선에 출마해 쉽게 국회에 입성하려는 것은 정치개혁가 다운 멋진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쓴소리를 했다. 

안 의원이 국회입성에 성공할지의 여부도 불투명했다. 새누리당은 대항마로 경찰청장과 코레일 사장을 역임한 허준영 후보를 내세우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보궐선거는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기 때문에 당 조직이 승리의 관건이다. 이 점에서 허 후보는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안 의원이 당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무소속 후보였던 반면 허 후보는 당 조직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론조사 결과도 예측을 불허했다. 진보정의당이 3월27과 28일 양일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허준영 후보 41.8%, 안철수 후보 38.5%, 김지선 후보 17.8% 순으로 오히려 허 후보가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과는 안철수의 압승이었다. 안 의원은 60.5%의 투표율을 기록해 32.8%에 그친 허준영 후보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국회입성에 성공했다. 지난 해 11월23일 대통령 후보직 사퇴 이후 152일 만에 이룬 성과였다. 

‘안철수 현상’, 험난한 앞길 예고

‘안철수 현상’은 ‘새인물, 새정치를 바라는 열망’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안철수의 승리는 그의 승리라기보다 ‘안철수 현상’의 승리라고 해야 옳다. 그 스스로 “나의 당선은 내 승리라기보다 새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이라고 생각한다”는 소감을 밝히기까지 했다. 

실제로 그의 승리는 새정치의 실현으로 볼 수 있는 요소가 많다. 비록 지역구 선택이 적절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새정치’란 슬로건으로 유권자들에게 어필했다. 기존의 제1야당인 민주당의 도움 없이 정부여당의 지원을 받은 허준영 후보를 거의 더블 스코어 차이로 제쳤다. 정치공학이 만연한 정치판에 그야말로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오는데 성공한 것이다. 

안철수의 국회입성에 정치권은 술렁이는 양상이다. 실제 그가 국회입성하면 야당발 정계개편의 핵으로 떠오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는 신당창당, 쇄신을 전제로 한 민주당 입당, 무소속 지위 유지 등 선택지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앞길은 여전히 가시밭길이다. 

그는 정계 투신 이후 줄곧 ‘새정치’를 의제로 내놓았다. 그는 대통령 후보직 사퇴의 변에서도 ‘새로운 정치’를 강조했다. 문제는 그가 내세운 ‘새정치’의 정확한 개념이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것이다. 

안철수 이전에도 기존의 정치풍토에 도전장을 내민 정치인들은 존재했다. 故 노무현 대통령은 의원 시절 지역주의 타파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고, 계파에 줄대기 보다 직접 국민에게 다가갔다. 정동영 前 의원은 지난 해 치러진 4.11총선에서 호남 지역구를 과감히 버리고 새누리당의 텃밭인 강남을에서 김종훈 후보와 맞섰다. 또 올해 10월 치러질 보궐선거와 내년 6월로 예정된 지방선거 등 향후 정치일정에서 새정치 구호에 걸맞은 이렇다 할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면 제2의 문국현으로 귀결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안철수는 보궐선거 승리를 통해 안철수 현상이 건재함을 입증했다. 또 그가 꾸준히 제기했던 새정치를 펼칠 기회도 확보했다. 이제 남은 건 안철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이다. 새정치의 실현 여부, 그리고 안철수 현상의 지속 여부는 안철수 자신의 정치적 역량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