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바로 서야 국가와 국민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정치인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국민과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를 해야 합니다

2013-04-09     김태인 차장

어릴 적부터 몸에 밴 근검절약정신

경남 의령이 고향인 박 회장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진주로 학교를 옮겼다고 한다. 당시 의령에서 사업을 하던 선친은 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함께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규모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부도 소식에 일가족은 진주로 터를 옮겨야 했다.

진주농림고등학교 2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와 야간부에서 학업을 이어간 그는 낮에는 부산대 교수연구실에서 연구 보조원으로 일하며 그 돈으로 학비를 충당해 결국 졸업을 하게 됐다. 대학에 진학할 가정형편이 어려워 군대를 지원한 박 회장은 군에서도 병참중대 최고요직을 맡아 국방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전역 후엔 전국에서 5명 모집에 무려 2,500명이 몰려든 서울의 서대문에 소재한 동화약품(주)에 당당히 입사해 3년간 최우수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최고의 영업기록을 달성하는 등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전국 124명의 직원들 가운데 3개월 연속 전국5위권 안에 실적을 유지하면서 회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직원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중학교 3년 동안 단 한 번도 점심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고 회상하는 박 회장. 그 때의 힘든 시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근검·절약정신이 몸에 배였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돈이 아까워 자장면 보통을 먹으면서도 직원에게는 넉넉한 인심을 베풀 줄 아는 박홍재 회장. 그는 평소 몸에 배여 있던 근면과 성실, 그리고 정직을 바탕으로 28살의 젊은 나이에 휀스사업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 벽돌과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쌓았었지 휀스에는 큰 관심이 없었을 때였죠. 하지만 ‘우리나라도 분명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휀스사업의 전망이 밝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제 생각이 맞아 떨어진 거죠.(웃음)” 

현재 전국에 수 백개의 휀스관련 사업장이 운영되고 있지만 박 회장과 같이 30년 이상 한 분야에만 몰두하여 살아남은 기업은 (주)한국휀스가 유일하다. 

“남에게 정직과 신뢰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늘 진실로 대하는 것, 그리고 근시안적인 안목이 아니라 장기적인 비전을 고려해 사업을 해온 것이 성공의 밑거름이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양심에 부끄러운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인, 사업가 그리고 참 봉사자

박 회장은 사업에서 뿐만 아니라 부산광역시의원 시절, 의정활동에 있어서도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제4대 부산시의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건설교통위원회 재직 당시, 항시 소신을 버리지 않고 시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의정활동에 전념했다. 아무리 좋은 설계도로 건물을 짓겠다고 할지라도 지역 주민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이 지적되면 절대 통과시키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도시계획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된 부산시청부근 지역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2년 반이라는 장시간에 걸쳐 부산시와 시정 질문을 통한 수차례의 공방을 벌인 끝에 결국 공용시설보호지역으로 제한된 도시계획을 해제시켜 인근 지역인 부산진구, 연제구 주민의 상권 활성화를 도모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5년 당시, 부전시장 상인들은 시장에서 발생하는 하루 수십 톤(ton)가량의 채소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크나큰 난관에 부딪힌 일이 있었다. 정부에서 2005년 1월1일부터 쓰레기 직매립 금지가 법률로 확정됨에 따라 기존에 이용하던 매립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됨으로써 톤당 4배에 가까운 인상료를 지불해야 할 입장에 놓인 상인들은 박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부산시청 담당 직원에서부터 엄궁농산물사업소와 반여농산물사업소 소장을 비롯한 관계 공무원과 수십 명의 상인대표와 수십 차례 협상을 거치면서 시청 과장, 국장, 심지어 부산시장에게까지 상인들의 입장과 어려움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결국 부산시와 상인들의 입장을 고려해 일정 수준에서 처리비용 단가까지 중재하여 성사, 관철시킴으로써 불가능함을 가능으로 성사시킨 중대 사안으로서 언론에 수차례 보도된 바도 있다.

대통령의 사면 복권시행은 진전성이 최우선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법에 저촉되는 줄 알고도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선을 위해 모르고 한 행동이 법에 저촉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기도 한다. 여기에 박 회장은 후자에 속한다. 전직 대통령의 국가 주요 기념일에 사면복권을 시행하는 면면을 보면서 박 회장은 너무나 억울하다고 한다. “수천, 수억을, 그것도 국민의 지탄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음에도 사면 복권되는가 하면 시의원 임기 중 최우수의원으로 부산의 시민단체가 대학에 심의·의뢰하여 의정활동 우수의원으로 선정 평가됨에 기자회견을 요구하여 기사화된 잡지책을 구입, 지역의 지인들에게 100여권 발송한 것을 선관위에서 무료로 주었다고 기부행위로서 선거법을 위반했다며 고발당하여 집행유예 형을 선고 받음에 억울함에 보다 못한 지역주민 2,000여명이 이명박 대통령께 탄원서를 제출하여 호소하였으나 검찰은 막무가내식 사법처리로 대통령 주변의 힘 있는 사람은 죄질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면, 복권을 시행함은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하루 속히 사면이 되어 지역 경제를 위해 이바지 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제가 늘 생각해온 신념이 있습니다.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치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 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청렴하고 국민들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정치인을 국민들이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국민과 나라에 버팀목이 돼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정치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이 원하는 정치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주인은 바로 ‘국민’이라며 정치인은 국민의 심부름꾼으로서 냉철히 정치적 사안을 지켜봐야한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불의를 보면 결코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그는 남은 생에 남을 돕는 일은 끊이지 않고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 20여 년간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에서 조정위원 활동과 더불어 라이온스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인생철학 때문이다. “남을 도와주는 일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어르신들을 모시는 것이 어찌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수년 간 무료급식을 해왔을 때 지역의 어르신들로부터 ‘자식보다 낫다’는 말씀을 듣고는 눈물이 글썽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앞으로도 우리 이웃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 할 생각입니다.”

‘지역이 성장해야 경제가 발전한다’는 박홍재 회장의 말대로 어려운 국가적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소신을 가지고 정도를 걸어감으로써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기를 염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