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는 대가없이 시작할 때 진심으로 전해지는 법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신념을 실천하고 있을 뿐입니다"
2013-04-08 김태인 차장
고대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된‘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도덕적 귀족의무는 계층간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 오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귀족 의무를 실천해 주변의 이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고는 한다. 이에 수 십년째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역의 발전과 봉사를 위해 힘쓰고 있는 이가 있다. 김해시 장유면에서 수산물 포장지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신진수출포장과 (주)SEP의 양한석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홀연단신의 몸으로 부산에 정착, 제2의 인생을 꿈꾸다충청북도 보은이 고향인 양 회장은 부산 항만사령부 경리과에서 군 생활을 보내게 된다. 때문에 부산으로 오게 된 그는 항만 경리과 예산계에서 일하면서 주일이면 부대 내 군인교회에 나갔고 오후에는 민간인 교회인 새마을교회에 나가 주일학교 봉사활동에 매진했다. 그렇게 밤낮으로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그를 눈여겨 본 교회의 장로는 제대 후 진로에 대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자신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업을 혼자 오래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라면 믿을만하니 함께 사업을 운영해 키워보자’는 얘기였다. 양 회장은 가족들과 상의 끝에 고향에 있는 자신의 몫의 상속분 전답을 팔아다 투자 자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사업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났을 무렵, 함께 동업했던 장로는 세상을 뜨게 되고, 양 회장이 사업을 인
수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신발, 내의, 섬유, 봉제 등을 전부 골판지 박스로 포장했기 때문에 포장박스는 없어서 못 팔 만큼 인기였습니다. 덕분에 많은 대기업에 납품을 할 수 있었습니다.”
탁월한 그의 사업수완과 성실함으로 일한 덕분에 사업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져 1975년 부산 사상공단에도 제일 먼저 입주를 했다. 이후에도 모은 재산으로 사업에 재투자를 한 결과 1986년, 2970여㎡(약 900평)였던 사상공단에서 더욱 규모를 늘려 1만 3000여㎡의 김해시 장유면으로 이전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신진수출포장·(주)SEP
경남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에 위치한 신진수출포장·(주)SEP는1968년에 설립해 올해로 45년째 이어가고 있는 향토기업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평균수명이 12.5년이라는 통계에 비춰볼 때 결코 짧지 않은 역사다. 신진수출포장의 주력 제품은 수산물 포장지로, 포장용 종이박스와 포장지를 러시아 연방국가 등에 수출하고 있고 국내에는 주문생산방식을 통해 납품, 연간 1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골판지 포장업계에서는 국내 최장수 기업이라 할 만큼 오직 한 길만을 보며 달려온 양한석 회장. 회사를 이전하면서 최첨단시설로 모든 생산설비를 자동화시스템으로 탈바꿈 한 후, 2007년에 (주)SEP를 설립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중견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그의 남다른 노력으로 인해 현재 신진수출포장·(주)SEP는 방수와 신선도 유지에서 단연 최고라는 평을 받고 있다.
새벽4시가 되면 일어나 새벽 기도를 드린 후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는 그는 지난 45년간의 역사를 한 마디로‘에벤에셀’이라 표현했다. ‘에벤에셀’은’‘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사무엘상 7장 12절)’라는 뜻으로 회사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오로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한 기도 응
답입니다”며 전했다. 교회 안수집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37세 때 장로가된 그는 지금은 교회시무에서 은퇴했지만 교회일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다.
부산광역시 남구의회 초대의장 홀연단신의 몸으로 시작하여 성공한 사업가로 우뚝 선 양 회장. 그는 장유
기업체협의회 회장, IBK 기업은행 부산최고 경영자클럽 회장직 등을 맡으며 부산의 상징적인 기업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치인으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80년, 당시 40대였던 양 회장은 급성 활동성 간염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해 부친상조차 제대로 참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그는 3개월 입원 후 퇴원하면서 다시 한 번 살아갈 기회를 준 하나님께 감사를 느끼고 그 길로 감림산 기도원을 찾았다고 한다.
“기도하면서 윤리적으로 많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경영과 이윤에만 치중해 직원들의 인권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으며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후 양 회장은 자신의 기업은 물론,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역 동장의 권유로 사회정화위원장 활동을 시작으로 거리질서운동, 불우이웃돕기 등을 하면서 구청 사회정화사무국 사무국장에 천거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86년, 광주 동구에 찾아가 자매 결연을 맺으며 영·호남간의 갈등 완화에도 이바지해 그해 11월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다. 이런 그의 지역 봉사 활동이 세간에 알려지자 정치적 입지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일류대학 출신 및 지역의 유명 인사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부산광역시 남구의회의 초대의장이 되었다. 하지만 양 회장의 정치 행보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지자체 의회 4년 후 치러진 지자체장 선거에서 구청장 후보로 당선되어 지부를 거쳐 중앙당에 올라갔지만 선거운동 중 갑자기 후보자가 바뀌게 되었다. 중앙당에서 학력이 높은 사람에게 공천을 바꿔준 것이었다. 그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비록 학위는 받지 못했으나 부산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 최고관리자 과정, 하버드대법정대학원 고위정책연구과정 등 8개나 되는 과정을 마치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였기에 학력 미달은 너무도 뼈아픈 상처가 되었고, 그
는 자존심 회복을 위해, 상처를 씻어 내기 위해 만학도의 길을 선택하게되었다.
지천명을 넘은 만학으로 고입 검정고시에서 박사학위까지
공천후보자의 기준이 학력미달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양 회장에게는 청천벽력 같았다. 이에 50이 넘은 지천명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검정고시부터 준비를 했다.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초등학교 이후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못했던 그는 3개월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해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연이어 대입 검정고시 준비에 돌입했다. 당시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센디에고주립대로 유학길에 오르던 장남을 붙들고 집중적으로 배웠다. 4개월 후 한과목의 과락없이 합격을 했다. 이렇게 7개월 만에 중·고교 과정을 모두 마친 양 회장은 내친김에 대학입시까지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동의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천명의 만학도로서 거침 없었던 그의 행보는 당시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을 만큼 화제였다. 하지만 그의 학구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아들, 딸과 같은 학부생들과 어울려 강의를 들으면서 그는 진짜 공부의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이 후 양 회장은 석사과정에 돌입했고 이어 정치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게 되었다.
시인, 수필가 그리고 칼럼리스트
박사학위 취득 후 여러 대학에서 강의 요청이 있었지만 그는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 시와 수필가로써 뿐만 아니라 칼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이미‘푸른 꿈과의동행’,‘ 양지로 서는 자유’라는 2권의 시집을 발행한 그는 “시를쓰는 순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새벽기도 후 고요한 가운데 펜을 잡으면 시상이 잘 떠오르곤 하죠. 요즘은 글을 쓰는 순간이 즐겁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양 회장은 규격화 된 세상이나 인간성의 외면보다는 내면의 중요성을, 인간의 가치관도 물질적인 면보다는 정서적인 면모를, 사랑과 평화, 양보와 용서의 근간을 이루며 더불어 공존하는 화평한 세상을 꿈꾸는 소박한 문인으로 2012년 12월 8일, 세계문학상 수필부문 본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고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국가를 비롯해 각계각층으로부터 받은 국민포장, 대통령 표창장, 공로패, 감사패가 300여 개나 되는 양 회장은 ‘꿈 은 갖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자’라는 가훈아래 받은 만큼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라고 했다.“ 꿈이 없는 이는 매사가 부정적이지만 꿈이 있는 사람은 긍정적 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며 꿈이 있어야만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고 그 꿈을 이루어 성공 했을 때는 반드시 사회에 봉사를 하는 것이 제일 큰 미덕”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더불어 양 회장은“자신에게 찾아온 기회와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고 전했다. 특히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면서 항상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다. 또한 현재는 장성만 전 국회부의장과 뜻을 같이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21세기포럼(출연금 20억 원)에도 이사로 참여하는 등 불굴의 의지와 창조적인 정신을 높이 평가받아 2012년‘한국 현대인물열전33선(한국인물연구원 발행)’에도 등재되었다. 자신이 걷는 길,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나이나 지위, 학력 등 지금의 조건들은 어떻게 마음먹고 최선을 다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전하는 양 회장. 약관 60세 중반에서야 못다 이룬 학문의 최고 경지의 꿈을 이뤘으며 기업가로 대성하여 섬기는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헌신하며‘주의 일’에만 전념하여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그를 통해 날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