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잠시 미국에서 애만 낳고 돌아올께요
2003-10-19 글/임정원 기자
까다롭다는 미국 시민권을 어렵지 않게 조기에 취득할 수 있다면 가정형편이 원만하고 자식을 유학 보낼 계획이 있는 주부라면 미 원정출산은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 가정의 가족계획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 더 나아가서는 국가 위신과도 연결된다는 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듣지 못했던 신종 유행어 ‘원정출산’이 이제 하나의 출산 유형으로 자리잡힌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정부는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무허가 출산알선 업체에 대한 집중단속을 시작했다.
태어날 아기에게 미국 시민권을 보장해주는 방편으로 원정출산이 생겨난 것은 5년 전. 이런 일탈된 일부 계층의 행위는 해를 거듭하며 점차 확산되어 오다가 얼마 전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가 손녀 원정출산 의혹으로 비난을 받아 생후 5개월 된 손녀의 미(美) 시민권 포기 문제를 변호사와 논의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원정출산이 또 한번 국민들과 언론의 화두에 오르게 되었다.
미국은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몇몇 국가 중 하나로 불법이민자든 여행객이든 미국 영토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렇듯 미 국적법이 채택하고 있는 속지주의는 잠시 미국에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아기들에 대한 배려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악용하여 임신 말기에 여행객으로 가장해 미국으로 건너가 아기를 낳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른바 ‘미국 국적과 한국 국적의 교묘한 양다리 걸치기로 이익을 보겠다는 편협한 이기주의’인 것이다.
美시민권 획득! 내 자식의 미래 보증서!
불과 몇 년 전까지 출산을 앞둔 임산부라면 가까운 여행이라도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 일부 임신을 앞둔 신세대 주부들은 오히려 그 때에 맞춰 여행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미국에는 현재 우리 나라에는 원정출산 전문 여행사가 성업이다. 영어가 짧은 임산부들을 위해 아예 한국어 통역까지 둔 병원이 있는가 하면 ‘출생에서 시민권까지’라는 광고가 한국어 웹사이트에 오르는 등 원정출산 서비스업체까지 생겨나고 있다.
이 중 한 업체는 미국 입국비자 발급에서부터 신생아 시민권 신청까지 일괄해서 처리해 주고 있고, 작년 5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산부인과 병원과 계약을 맺어 ‘애 낳는 여행’을 알선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신청해도 두 달 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로 사태는 심각하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오렌지카운티 지역에서 태어나는 한인 신생아는 1년에 모두 2천명 선.
한국 원정출산 산모들의 숫자가 한달 평균 20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게다가 LA타임스에서 ‘한국 美원정출산 한해 5천명’이라는 제목으로 현재 미국에서 원정출산으로 낳는 아이가 한해 5천 명으로 추산되고 있고, 원정출산 희망자를 위한 전문서비스업체가 성업 중이라고 보도된 바 있다. 이 신문은 우리 나라의 한 산부인과 의사의 말을 인용하여 연간 한국 신생아의 1%인 5천 명이 매년 미국에서 원정출산으로 태어나고 있으며 이 병원에서만 임산부 10명 정도가 매달 미국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가 막힌 것은 이런 현상에 대해 ‘극히 일부 산모들은 한반도 전쟁 발발시 탈출구로까지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는 사실이다.
한 나라의 국민이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원정출산을 나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듯 같은 국민으로서의 자존심뿐만 아니라 위화감까지 조성할 수 있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 나라에서는 공공연하게 미국 원정출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1만 5천 달러로 사회보장번호 등록까지
그렇다면 원정출산을 부추기고 있는 전문여행사, 미국현지 관련업체의 서비스와 비용은 어떠할까? 여행사 패키지를 이용하면 보통 9900∼1만 5천 달러로 여권 발급에서부터 항공편 예매, 출산, 산모 몸매관리, 신생아 시민권 신청·사회보장번호 등록까지 일관적으로 마칠 수 있다.
여기에는 출산 한달 전부터 산후 4주까지 미국에 머무르는 경비가 포함된다. 가격은 주로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어디서 머무르냐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비용은 출산 전, 입원 및 출산, 산후조리 과정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출산 전부터 병원 직영 산후조리원에서 한 달간 생활하다가 입원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민박, 하숙집에서 머물다가 입원하는 경우도 있다.
출산 및 입원 비용은 자연분만을 하게 되면 약 3500달러. 여기에는 검진·혈액검사·초음파검사 등 산전관리, 분만, 입원비용 및 분만 후 소아과·산부인과 검진까지 모두 포함된다. 패키지 비용 가운데 큰 비용을 차지하는 것은 출산 후 병원서 직영하는 산후조리원 이용료로 출산 전 1박에 140달러에다가 산후 4주까지 생활하는데 7500달러가 든다. 산모의 모유 수유를 돕기 위한 교육 및 젖몸살 마사지 서비스를 실시하며 고성능 유축기가 비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산후 회복을 위한 체조 교실도 이용할 수 있다.
산후 조리원보다 더 저렴한 방법으로 침대가 딸린 방 1개와 식사가 제공되지만 거실과 식당, 화장실 등은 공동 사용을 해야한다는 하숙집을 이용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 병원 근교에 있는 하숙집의 경우 한달에 1천달러 정도이다.
또한 관계업체 조사결과 원정출산을 가는 산모들의 70∼80%가 경비를 아끼기 위해 혼자 미국행을 택한다고 한다. 이런 산모들을 겨냥해 ‘도우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현지에서 인기가 아주 높다고 한다.
각박한 우리 나라 현실에서 키우고 싶지 않아요
미 원정출산을 앞둔 주부 정모 씨(27세·대치동)는 “누구인들 나가서 자기 자식을 낳고 싶겠어요? 태어날 우리 아이만은 각박한 우리 나라에서 키우고 싶지 않아요. 과외열풍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도 그렇다고 맑고 티없이 자라기만 바라기엔 우리 나라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라 말한다.
그리고 결혼한지 9개월 되었다는 주부 윤모 씨(24세·신당동)는 “저희 부부는 결혼 후 몇 년 있다가 미국에 갈 계획이 있어요. 시부모님도 미국에 계시고요. 그래서 아이를 위해서라도 원정출산을 생각하고 있죠. 장기적으로 볼 때 필요한 가족계획이어서 추진하고 있는 일인데 요즘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참 많은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혹시나 가게 될지도 모르는 10∼20년 후 자식들의 유학을 위해, 또는 아들의 병역을 회피하기 위해 원정출산을 가는 상황에 대해 윤모 씨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원정출산을 일부 주부들이 교육이다 병역이다라는 등 딱 한가지 이유로 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복합적으로 여러 상황을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지 그리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생각해 보세요. 예전만 해도 자식들의 외국 유학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부 가정에서 이루어져왔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상황은 달라졌어요. 요즘 학생들의 입에서는 외국 유학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선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한해 한해 달라져만 가는 상황에서 앞으로의 자식 교육을 걱정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경제적 여건이 풍족하지 않더라도 남들보다는 뒤쳐지지 않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10년 후 아이의 유학을 계획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봤을 때, 미국 시민권이 있는 아이들은 미국에서 학교를 큰 돈 안들이고 다닐 수 있을 것이고, 그다지 실효성도 없는 한국의 과외열풍에 휩싸이지 않아도 되잖아요.”
대개 한국의 일부 부유층 임산부들이 원정출산을 선호하는 이유가 좋은 교육기회와 병역혜택을 얻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원정출산 현상에 대해 유명준 기자의 사설에는 ‘영어를 한국사보다 우대하는 나라, 그래서 국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을 진학하려 해도 영어시험을 우선 잘 봐야하는 나라, 국내에서 아무리 일류대학 박사를 따도 미국 대학 박사 출신에게는 밀리는 나라, 미국적 사고방식은 선진사고방식이라고 취급하고 우리의 사고방식은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는 나라. 때문에 이러한 한국의 현실에 치인 부모들의 선택이 곧 자식들의 조기 유학을 선택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드는 교육비 등을 감안해 아예 원정 출산을 하는 이도 생기는 것이다. 영어교육을 떠나서도 일류대에 들어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 들어간 후엔 다시 ‘일류 직장’을 얻기 위한 더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자신의 아들, 딸들은 벗어나게 해주고픈 마음이 이 같이 원정 출산을 부추긴다고 본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어떤 언론의 사설에서는 이 현상에 대해’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치열한 1등 다툼을 시키고, 이 때문에 사교육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사교육비 때문에 아기를 낳지 않게 되며, 이는 곧 미래 노동인력의 감소를 가져오고, 사회는 노령화되고 또 국가 경쟁력은 떨어지는 악순환이 실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이민이나 원정 출산을 감행한다고 볼 수 있다.’라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확대해석이라 단정지을 수 있을 글일지 모르지만 이들의 행태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이는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조기교육열풍과 세계화 경쟁이 큰 원인
그리고 원정출산 현상에 대해 우리 나라 교육의 붕괴가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조기교육 열풍과 세계화 경쟁이 신생아 출산으로까지 확대됐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한국사회는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을 노려 왔는데, 요즘은 아무리 한국에서 일류대를 나와도 크게 성공할 수 없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그 탈출구로 나온 것이 ‘조기유학’ 열풍이다. 아예 한국을 떠나서 넓은 세계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다. 원정출산을 조기유학의 확대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결국 한국이란 사회가 그리고 교육현실이 국민을 쫓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딱히 그 원인이 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한마디로 단정지을 수 없어도 이러한 현실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자체만으로도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한국인 뿐 아니라 홍콩과 대만인들 사이에서도 원정출산이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올 여름부터 발효되는 새 이민 규정에 따라 원정출산을 계획했던 일부 임산부들은 여행목적을 공항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경우 체류기간이 현행 6개월에서 30일로 단축될 수도 있다고 한다. 만일 서류상의 문제로 만삭이 된 산모의 출산 일정이 애매해 진다면 자칫 잘못하면 양국간의 반인류적인 사건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극도로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할 산모가 불안한 심리상태로 출산을 한다면 그 아이의 심리적인 피해는 그 누가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일까.
게다가 미국 현행법상 시민권을 획득한 아이가 18세가 될 때까지는 시민권을 포기할 수 없고 18세가 될 때 비로소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사회적 비난을 받은 이회창 의원도 정해진 손녀의 미 시민권을 돌려놓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말 한마디 못하는 갓 태어난 아이는 부모의 욕심에 의해 국적이 정해졌다가 비로소 18세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데로 국적을 선택할 수 있다고 절대 감사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체감의 혼란 속에서 이 나라 사람도 저 나라 사람도 아닌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소중한 시간들을 누구도 보상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얼마 전 ‘이탈리아 신발 수입업자인 31세의 만삭이 된 임산부가 몸을 가리기 위한 헐렁한 옷을 입고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아이를 낳기 위해 3개월간 머물 것이다.’라는 미국 원정출산의 사례가 미국 신문에 소개되었다. 만삭의 임산부가 관광비자로 미국에 오는 것은 현행법상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원정출산에 필요한 경비 2만달러만 있어도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미 시민권도 가질 수 있다면 좋은 기회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참으로 성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굳이 미국 시민이 되겠다면 이민 등 정당한 법절차에 따라 지위를 얻는 것이 마땅하다.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여 내린 중대한 결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부모들의 변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의 생각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