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의 패배 위기의 야당, 정계개편 불가피할 듯
박지원 원내대표 사퇴 "처절한 성찰과 혁신의 길로 가야"
지난 12월21일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가 사퇴했다. 박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의원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는 패배했다”며 “우리는 처절한 성찰과 치열한 혁신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 문재인 전 대선 후보와 만나 사퇴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앞서 이해찬 대표 등 6ㆍ9 전대 지도부가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총사퇴하고 박 원내대표도 사임함에 따라 민주당은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임시 전대까지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로 운영된다. 비대위원장은 이 대표 사퇴 이후 대표대행을 겸했던 문 전 대선후보가 조만간 지명할 예정이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혁신해야”
지난 12월21일 민주통합당은 국회에서 마라톤 의원총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대선패배와 정권교체 실패에 대한 책임 및 향후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이날 의원총회에서는 대선패배에 대한 무한책임을 통감하고 뼈를 깎는 혁신으로 나아가자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등 구체적인 수습 방안과 대선 패배 책임론을 놓고 주류와 비주류 간 입장차를 보여 갈등의 여지를 남기기도 했다. 윤관석 원내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국민의 정권교체 여망을 담아내지 못한 반성과 함께 당을 새롭게 혁신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고 지지해준 유권자에 대한 무한 책임감을 결의하는 자리였다”고 밝혔다.
대선 패배 이후 처음 열린 이날 의총은 40여명이 발언에 나설 정도로 진지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또한 특정 인사나 세력을 비판하는 발언은 자제하는 기류가 강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반성과 성찰이 우선이라는 분위기였다. 민주당은 조속한 시일 내에 선거전략과 캠페인, 정책공약 등 선거운동 전반에 대한 평가를 시작하고 선거백서로 정리하기로 합의했다.
앞서 이해찬 전 대표 등 최고위원 전원이 지난해 11월18일 안철수 전 대선 후보와의 단일화 물꼬를 트기 위해 사퇴한데 이어 이날 박지원 원내대표와 이용섭 정책위의장도 대선 패배의 책임을 통감하며 물러나 사실상 민주당은 모든 지도부가 총사퇴한 상황이다.
의총에서는 비대위 구성과 권한, 존속기간 등을 놓고 주류와 비주류 간 논란이 벌어졌다. 문병호 정성호 최원식 의원 등 비주류는 문재인 전 후보가 비대위원장을 지명하는 것을 문제 삼고 나섰다. 대선 종료에 따라 문 전 후보가 더 이상 당 대표 권한대행이 아니기 때문에 지명권을 행사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박 원내대표와 윤호중 사무총장은“지난달 지도부가 총사퇴할 때 문 후보는 대선 후보 겸 당 대표 권한대행을 맡는다고 했기 때문에 권한대행으로서 비대위원장을 지명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비대위 권한과 존속기간에 대해서는 조속히 새 지도부를 선출해 당의 혁신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조기 전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수 의원들은 비대위가 혁신은 물론 범야권 통합까지 추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운영기간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비주류 측에서는 원내대표를 빨리 선출해 비대위원장을 겸임하도록 하자는 주장도 했지만 다수는 원내대표 조기선출에 공감하면서도 비대위원장을 겸임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이는 문 전 후보로 대표되는 주류가 비대위 구성을 주도해 또 다시 당권을 장악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 아니냐는 비주류의 걱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비주류 인사들로 이뤄진 쇄신모임의 이날 오전 회동에서는 주류 친노그룹에 대한 성토와 함께 문 전 후
보가 대선 과정에서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선거 패배의 책임 있는 인사들이 2선 후퇴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 향후 비대위 구성과 원내대표 선출 등 당 수습 과정에서 계파 간 권력투쟁이 본격화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주류 측은 당 정상화 노력을 마치 기득권을 연장하려는 시도처럼 보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대선기간 모든 계파를 중용하는 ‘용광로 선대위’를 꾸렸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친노의 독점으로 대선에서 졌다는 식으로 몰아가면 안 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범야권 정계개편 이루어질까
이에 민주통합당에서는 당의 외연을 확장하고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범야권 정계개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과거 지지율‘20%대 민주당’이 아니라 대선 득표율인‘48%
민주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이야기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을 담기에는 현재의 민주통합당의 그릇이 너무 작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범야권 결집이 명분을 얻으려면 강도높은 당 쇄신이 전제돼야 한다. 혁신 없는 정계개편은 대선 패배 국면을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당내에서는 범야권 대선공조기구였던 ‘국민연대’참여세력을 통합의 일차적 대상으로 보고 있다. 국민연대에는 민주당은 물론 진보정의당, 재야 시민사회, 학계, 종교계, 문화계 인사들이 참여한 바 있다.
정계개편 과정에서 안철수 무소속 전 후보까지 포괄하는 것을 최상의 시나리오로 여기고 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우선 민주당의 강도 높은 쇄신을 전제로 국민연대 참여인사가 당에 합류하는 당 재건 방식이다.
한편으로는 민주당과 외부세력이 합치는 신당 창당도 상정 가능한 방안이다. 외부세력이 별도 정당을 만들면 민주당과 합치는 방식인 것이다. 이 같은 개편방안은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된
후 본격적으로 논의될 전망인데, 비대위원장을 외부인사로 앉히자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이 꿈꾸고 있는 정계개편이 계획대로 추진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지수다. 당장 안 전 후보 측의 경우 야권에서 정계개편 움직임이 있더라도 쉽게 합류할 가능성이 낮다는 관측이다. 안 전 후보 측은“지금은 기성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본인의 행보를 모색하는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한 때”라고 선을 그은 바 있다.
오히려 한두 달 일정으로 방미한 안 전 후보가 귀국 후 독자적인 신당 창당에 나선다면 민주당의 원심력이 강해지면서 민주당이 수세에 몰릴 가능성도 있다. 또한 민주당의 비주류에서는 친노 패권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친노의 2선 후퇴, 심지어 일부 친노 인사들의 정계은퇴 필요성까지 거론하고 있어 갈등이 격화될 경우 민주당이 쪼개지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야당발 정계개편의 변수는 여전히 안철수 무소속 전 대선 후보다. 민주당으로서는 문 전 후보가 야권 역사상 최대인 1,469만 표를 얻을 수 있었던 것 또한 안 전 후보가 사퇴를 통한 야권단일화에 동참한 결과라는 점에 대해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처지다.
우선 민주당은 안 전 후보가 꾸리게 될지 모를 신당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다. 민주당에 합류해주면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 전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무소속 후보로서의 한계를 느꼈다는 점에서 스스로 당을 만들어 차기 대권을 노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
안 전 후보가 신당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 윤곽은 오는 2월쯤 드러나게 될 전망이다. 4월에 재보궐 선거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 전 후보가 이전에“지난 4·11 총선에 출마했어야 했다”며“국회의원을 못 한 것이 아쉽다”는 말을 했다는 점 등으로 미뤄볼 때 안 전 후보는 재보궐선거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여기서 민주당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간판급 인물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안 전 후보가 야권의 중심으로 떠오르면 민주당은 그야말로 재기의 발판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3년에 민주당과 안 전 후보가‘새 정치’를 화두로 두 번째 레이스를 벌이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선 패배로 충격에 빠진 국민연대 등 야권을 지지하는 시민사회의 입김도 거세게 일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에는 분열을 어떻게 봉합하느냐가 2013년 최대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