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꿈’과 ‘파괴의 꿈’이 공존하는 시대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 지젝의 통렬한 사유 『멈춰라, 생각하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월가점령시위부터 아랍의 봄까지 세계 곳곳에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가 일어났지만, 이 저항을 근본적인 사회 변화의 시도로 바꾸기 위한 기획은 부재했다. 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한 각국 정부의 개입은 시장의 부채를 공공 부채로 이전하며 ‘부자들의 사회주의’라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 현상에 대한 저항이 격렬하게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긴 쉽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하기 어렵다.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이자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리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석학 슬라보예 지젝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현 체제의 본질과 유지 원리를 곰곰이 생각하고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냉철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제안한다.
월가점령시위부터 아랍의 봄까지
월가점령시위는 패권 이데올로기의 진공 상태, 즉 새로운 대안과 이데올로기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그러나 월가점령시위의 핵심 정신을 놓치지 않고 진정한 변혁을 이끌어내려면 여러 과제가 아직 남아있다.
이에 대해 슬라보예 지젝은 첫째, 문제는 개인의 부패나 탐욕이 아니라 그들의 부패를 조장하는 시스템이라는 인식을 공고히 해야 한다.
둘째,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단순한 비판, 즉 더 공정한 다른 자본주의가 있다는 식의 비판은 거부해야 한다. 셋째,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위의 숭고함을 찬양하고픈 유혹도 피해야 한다. 최근 벌어진 시위들은 진정한 분노를 표출했지만 그 분노는 변화를 위한 최소한의 계획으로도 전환되지 못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넷째, 친구임을 가장하여 시위의 의미를 희석시키고자 애쓰는 부류도 조심해야 한다. 지젝은 여기서 민주주의라는 틀에 갇히지 말고 그보다 더 개방적인 사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멈춰라, 생각하라』를 통해 헤겔의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적 토대와 영화, 미드, 뮤지컬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2011년 월가점령시위부터 아랍의 봄을 통해 번져 나온 ‘해방의 꿈’과 총기 난사로 7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노르웨이의 브레이비크 사건과 같은 ‘파괴의 꿈’을 면밀히 분석한다. 지젝은 이 양방향의 꿈들을 다시금 의미하며 현재 지배이데올로기의 윤곽을 그리면서 자본주의의 기능을 강화시키지 않으면서 그에 맞서 싸울 방법을 찾는 과제를 풀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