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자본으로 꼬치구이 장사 한 번 해 보실래요”
‘자유로운 삶을, 행복하게 산다’는 인생 좌우명을 실천하고 있다
저 자본 고수익의 원천 꼬치구이 전문점으로 오세요
체인점 10년 만에 가맹점 30여 개를 만들었다. 소자본 창업으로 도시서민 월급을 능가하는 고소득을 보장하지만 한국인 나름의 체면문화가 꼬치사업에 선뜩 나서지 못하도록 해 체인점 사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창업을 하면 돈을 벌어야 하지만 그럴듯한 시작을 주위에 알리기 좋아하고 적당한 규모에 종업원이 있는 가게를 선호하는 창업자들에게 꼬치사업은 선택하기 어려운 품목인지 모른다. 꼬치구이는 찬바람이 나는 가을부터 겨울이 지나는 동안이 성수기다. 서희원 대표는 ‘성인들은 관계상 음식을 먹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먹는다’며 꼬치구이의 사업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삼겹살 1인분 정도가 꼬치구이 1개 값으로 부담이 없다며, 닭으로 만든 꼬치구이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먹을거리이자 맛있는 간식의 대표주자라고 했다. 꼬치구이는 공장에서 완전히 익혀서 냉동에 보관하므로 맛이 변하지 않고 유통에 문제가 없는 점이 강점이라며 서 대표는 구이기계를 개발하여 생산된 완제품을 가맹점에게 공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12년 전에는 구이가 없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서 대표의 노력으로 현재는 꼬치구이가 공장에서부터 안전하게 구워져 냉동보관까지 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며, 닭으로 만들어진 유사제품보다 훨씬 앞선 기술의 진보라고 자부했다. 2002년 이전에는 구이에 기름을 바르면서 먹었었고 그 후에 튀김꼬치가 나왔다. 다양한 제품개발이 소비자 입맛을 두드렸지만 수명이 길게 가지는 못하고 시장 뒤편으로 사라졌다고 회고했다.
결코 망하지 않는 꼬치구이 창업
서 대표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는 꼬치장사를 하면서 유통 사업을 병행했다. 가맹점수가 늘어나면서 한주에 꼬치판매가 약 2만 개를 넘어서자 유사업체에서 서 대표 꼬치를 흉내내 판매하는 업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꼬치공장에 압력을 넣어 서 대표에게 꼬치공급을 중단시켜 버리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때 가맹점수가 이미 9개 정도나 되었으므로 꼬치공급중단은 사실상 영업의 존폐를 의미하게 되었고, 결국 서 대표는 꼬치공장을 설립하게 만들었다. 가맹점과 맺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시작한 것이 지금의 제조를 한 계기가 된 셈이다.
한때 꼬치구이가 간식거리로 아이들에게 판매돌풍을 일으키게 되자, 중국 무역상에서 꼬치자문을 해왔다. 자문을 받은 업체는 후에 중국에서 꼬치를 대량 수입해 국내에 보급하면서 꼬치 무풍지대가 되어 버렸다. 중국꼬치가 국내 꼬치시장을 강타하면서 전국에 60여 군데 꼬치전문 업체가 우후죽순으로 순식간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중국산의 항생제 사용이 불허되고 중국 생산원가 상승과 유통경로의 문제 점등으로 시장은 활로를 잃게 되었고, 현재는 전국에 2개 업체만 생존하여 영업을 진행하고 있다.
꾸준히만 하면 대박 아이템이 꼬치구이 사업이다. 5평 미만의 작은 가게에서도 꼬치구이는 불티나게 팔리는 제품이다. 서 대표는 가맹 점주들을 위하여 체인본부의 수익은 최소화하고 전국어디에서도 동일한 가격으로 물류를 공급한다. 제주도에만 15여 군데 가맹점이 나가 있어 가맹점의 잠재 생존력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장사 한번 해 보실래요
‘내 인생의 밑천, 수박 26개로’ 로 시작하는 서희원 대표의 자서전은 ‘100원을 벌려거든 100리를 걸어가라’는 교훈처럼 무모하고 참담한 현실을 구술 적으로 표현해 지난 2월 발간했다. 수박장사에서 노점상으로, 그리고 꼬치에 인생을 걸기까지 숱한 애환과 애증이 책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고, 장사에 대한 경험과 지식은 그만의 독특한 현실인식과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꼬치인생처럼 가진 것이 없어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에게는 꼬치장사를 하라고 역설한다. ‘서희원꼬지닷컴’이라는 실명을 넣은 이유도 가맹점이 한곳이라도 있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으로 지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꼬치사업이 한창 대박행진을 한때 일선학교에서 식중독 사고가 발생하여 학교 주변에 음식점에 대한 경계령이 내려진 적이 있었다. 모두들 장사가 안 된다고 아우성이었고 모든 음식 장사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서 대표는 손님들을 안심시킬 방도로 비닐봉투를 만들어 상호와 휴대번호를 새겨 손님들에게 ‘꼬치 드시고 문제 있으면 목숨 걸고 책임집니다. 이 봉투에 담아갔다는 증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모두들 봉투에 담아가세요’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이렇게 하여 콜레라로 파리가 날릴 때에도 꼬치닷컴은 타 업체와 달리 시장에서 꿋꿋이 생존력을 가지고 성장해 왔다. 꼬치매장을 할 때, 한 아주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 보기에도 기풍이 있어 보였는데 그는 “자녀분이 미래에 어떤 사람이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아주머니는 대뜸 “꼬치 같은 사람이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아주머니는 ‘아저씨는 늘 행복하잖아요. 아저씨는 걱정 없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말하더라는 것이다. 자기하는 일에, 자기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고마운 손님이 어려운 꼬치장사 과정에는 많이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행복한 순간들이었다고 술회했다. 1992년 ‘자유로운 삶을, 행복하게 산다’는 인생 좌우명을 실천하기 위해 홀연히 월급쟁이 삶을 청산하고 장사길로 들어서 오늘까지 20년 동안 장사꾼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서 대표는 손님을 즐겁게 하고 자신이 행복해지는 ‘꼬지닷컴’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