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만에 불붙은 ‘故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
석연찮은 두개골 함몰흔적 발견, 진상조사 요구 높아져
박정희 정권 당시 재야운동가로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의문사한 故 장준하 선생의 유골 동영상이 공개됐다. 유족들은 고인의 두개골에서 의문의 함몰 흔적이 확인된 만큼 타살의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어, 사망원인을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 되고 있다.
석연치 않은 두개골 함몰 흔적
지난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중년의 한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펼쳤던 故 장준하 선생이었다. 이번 공개된 유골은 그의 것이었다. 동영상에 따르면 오른쪽 두개골에 지름 6~7cm의 구멍이 확인됐다. 유족 측의 주장에 따르면 추락에 따른 사망으로 보기에는 두개골의 함몰 흔적이 너무 매끈하며 기타 골절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타살 가능성을 강력히 제기했다. 이에 따라 유족들은 정부 차원의 재조사를 촉구했다.
하지만 유골 검사에 참여한 한 교수는 故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에서 발견된 함돌 흔적이 둔기 등 외부 흉기에 의한 것이지, 실족에 의해 넘어지거 추락하면서 생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묘소 개장에 참여한 이윤성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연수소 교수는 “유족들이 유골을 훼손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해 속을 들여다보거나 샘플을 채취하는 등 구체적인 조사가 미흡해 검사에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故 장준하 선생에 대한 권력기관의 타살 의혹은 이미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회부돼 관련 조사를 진행한 바 있지만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 묘소 개장을 통해 석연찮은 두개골 함몰흔적이 발견됨에 따라 유족의 요구대로 재조사가 실시돼 정확한 사인이 규명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기념사업회과 유족 측, 청와대에 재조사 요구지난 8월20일, 묘소 개장과 함께 불거진 故 장준하 선생 타살의혹과 관련해 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와 유족 측은 청와대에 사건재조사와 진상 규명을 공식 요구했다. 기념사업회는 청와대에 조사요구서를 제출하고 “최근 묘소 이장 과정에서 유골을 37년 만에 처음으로 검시한 결과 타살 가능성이 명백히 드러난 만큼 국가기관에서 즉각적인 재조사와 진상 규명에 착수해야 된다”며 “이명박 대통령께 장준하 선생 의문사 규명 재조사를 공식적으로 요청한다”고 밝혔다.
유족인 아들 장호권 씨도 8월21일 “37년 전 아버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타살을 확신했다”며 “일단 개묘 후엔 6개월 내에 과학적 검시를 해야 하므로 빨리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 씨는 이날 오전 MBC라디오 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전날 청와대에 장 선생 의문사에 대한 재조사 요청서를 전달한 데 대해 과거사의문사조사위원회가 구성됐을 때 처음엔 기대를 많이 했지만 조사활동이 수사권을 갖지 않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 씨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등 정부 차원 진상조사가 세 차례 진행된 데 대해 언급하며 “당시 조사의 한계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박정희 대통령의 한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알리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했다”고 덧붙였다.
기념사업회는 지난 8월1일 장 선생 유골을 경기 파주시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서 파주 통일동산 장준하 추모공원으로 이장하던 중 유골 검사를 실시해 추도식 하루 전인 8월16일 그 결과를 공개한 바 있다.
기념사업회의 발표에 따르면 그의 두개골에서 석연치 않은 함몰흔적이 발견됐다. 오른쪽 귀 뒤쪽에 지름 6cm 가량의 원형 함몰부분이 있는 반면 다리나 갈비뼈 등에는 골절 흔적이 없었다는 것. 이는 1975년 등산 도중 실족사 했다는 당시 공식발표에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대목이다.
장 씨는 “시신 상태가 추락사로 보기 힘든 아주 온전한 상태였고 당시에 들었던 목격자 진술과 의문사조사규명위원회에서 들었던 진술에 일관성이 없던 것, 그리고 당시 시대상황 등을 복합적으로 볼 때 타살이라고 인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유골을 육안 검시한 한 교수가 두개골의 함몰 부위가 가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추락 시 부딪쳐 생긴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 데 대해서는 “타살의 확증이 아니라는 얘기는 또한 추락사의 확증도 아니라는 얘기”라며 “이런 검시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확인해 나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장 씨는 “일단 개묘를 한 후에는 유골이 빨리 부패하므로 최대 6개월 내에는 다시 검시를 과학적으로 해야지만 그 시기를 놓치게 되면 상당히 힘들기 때문에 빨리 진행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진상조사 문제로 시끄러운 정치권
지난 8월17일 민주통합당은 故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의결했다. 김현 대변인이 전한 확대간부회의 결과에 따르면 진상조사위원장에 이부영 상임고문이 선임됐다. 과거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이 상임고문은 사단법인 장준하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이기도 하다.
이해찬 대표는 “선생은 우리 현대사의 증인이며 반드시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야 할 것”이라며 장 선생의 37주기에 즈음에 사인을 반드시 밝혀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이날 회의 직후 이해찬 대표, 박지원 원내대표, 김현 대변인 등은 고인의 이장을 지켜보기 위해 파주 탄현면 장준하 공원을 찾기로 했다.
지난 8월23일 새누리당은 민주통합당의 진상조사 요구와 관련해 “장 선생의 죽음을 선거에 이용하지 말라”고 거듭 주장했다. 이날 홍일표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장 선생의 죽음을 선거에 활용하려는 민주당의 태도가 도를 넘어 유족들에 대한 결례, 상대당 후보에 대한 무례에까지 이르렀다”며 이 같이 밝혔다.
또한 그는 “당초 민주당은 장 선생 죽음과 관련해 새누리당 후보의 책임론과 사퇴론까지 들먹이다가 이 같은 태도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이 일자, 오늘은 퍼스트레이디 역할론을 제기하며 입장표명을 요구했다”며 “이는 순수한 입장에서 재조사를 바라는 유족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노무현 정권 당시 조사에서 장 선생의 사인은 진상규명 불능으로 나왔고, 당시 국무총리가 이해찬 민주당 대표였다”며 “당시 진상조사를 제대로 못했다면 이 대표가 사과할 일”이라고 말했다.
장 선생 사망원인과 관련한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 구성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는 “원칙적으로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게 사실이 규명돼야 한다는 입장”이라면서도 “유족들이 청와대와 정부에 조사를 신청한 만큼 그 결과를 보겠지만, 우린 과거 세 차례의 의문사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을 뒤집을 만한 게 나온 게 아니라고 보고 있다. 진상조사를 더 해야 할지 말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한편 김영삼 前 대통령이 기념사업회와 유족들이 발족을 준비 중인 가칭 ‘장준하 선생 의문사 범국민진상규명위원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전해져 귀추가 주목된다. 이는 故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가 직접 찾아가 김 前 대통령 측에 직접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김 前 대통령 측은 “유족들의 아픔과 뜻을 존중해 흔쾌히 동했다”고 밝혔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 범국민진상규명위원회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 민주화 원로를 주축으로 꾸려져 8월말 출범할 예정이다.
돌베개 장준하 선생, 그는 누구인가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바 있는 돌베개 장준하 선생은 사상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으며, 1944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학도병으로 중국에 끌려갔다.
그 뒤 그곳에서 즉시 탈출해 김준엽 前 고려대 총장 등과 함께 6,000리가 넘는 길을 걸어 충칭에 있는 광복군 본대에 합류했다.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 정보기관의 특수게릴라 훈련을 받고 대기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해 김 구 주석의 수행비서 등으로 일하기도 했다.
1953년 부산에서 월간 사상계를 창간해 이승만 독재정권을 비판했다. 이후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한일국교정상화 협상과 베트남 파병 등을 반대했고, 유신의 폐해에 적극 맞서기도 했다.
장 선생이 이끌었던 사상계는 지식인들 사이의 필독서로 인식되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62년에는 국제적인 언론상인 막사이사이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그는 총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겪으며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 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돼 3개월간 투옥됐으며 그해 6월 옥중출마로 서울 동대문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73년 12월에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고, 이듬해 4월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2월 지병 악화로 가석방됐다.
출옥 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주력했다. 1975년 8월17일 경기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추락사한 모습으로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