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체제, 우려 일축하고 예상 외 연착륙

김정은은 과거사에서 자유로워 대화상대로 인정해야

2012-02-08     지유석 기자

북한은 무척 다루기 힘든 주제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폐쇄성과 이에 따른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는 예측 불가능성을 증폭시켜주는 주요한 변수다. 김정일의 사망 이후 북한 체제의 권력이동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 지역정세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북한 체제의 폐쇄성과 불확실성에 따른 한계로 인해 그 어느 누구도 쉽게 예단하기 힘든 실정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후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북한의 정치적 장래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수습지도자의 갑작스런 부상?

우선 가장 확실한 대목은 김정일 위원장의 셋째 아들 김정은이 최고 권력자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정은은 올해 29세(1983년생)로 알려져 있다. 김 위원장 사망 후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극하면서 그의 나이는 초미의 관심을 끌었다. 비단 수자 때문이 아니었다.
북한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고질적인 식량난으로 인해 국민들은 굶주리고 있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핵개발 포기 압력을 받고 있다.
북한의 처지에서 볼 때, 가장 유력한 대화상대는 바로 남한이다. 그러나 남한에서 보수성향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는 꽁꽁 얼어 붙었다. 이 와중에 약관의 김정은이 북한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다.

김정일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난 12월 남한은 물론 국제사회는 북한 권력체제의 급작스러운 붕괴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런 우려는 김정은이 아버지와 달리 탄탄한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했다는 데 근거한 것이다. 실제 후계구도에 대한 논의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2008년 8월 이후에 본격화되기 시작해 그해 11월 김정은으로 최종 낙점됐다. 통상 차기 권력자에게 정권을 넘겨주는데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4~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정일의 경우도 32세인 1974년 비공개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내정된 뒤 20년 동안 착실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김정은이 아버지로부터 후계 수업을 받은 시간은 만 3년에 불과하다.

또 북한 권력의 중추는 군이다. 북한의 권력구조에서 군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다. 김정일 역시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권력은 바로 군부였다. 문제는 짧은 수습기간 탓에 리더십이 검증된 바도 없는 김정은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군부를 제대로 장악할 수 있는가였다. 북한 체제의 권력이동을 바라보는 데 불안감이 팽배했던 건 당연해 보였다.

김정은 체제, 예상외 연착륙

그러나 북한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대남, 대미 선전공세를 통해 체제안정을 과시하는 모양새다. 북한은 먼저 지난 12월30일 국방위원회 명의의 성명을 통해 “이명박 역적패당과 영원히 상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남한 정부가 정부 차원의 조문을 하지 않고 민간조문단도 제한적으로 허용한 처사와 천안함 사건의 최종 책임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있다고 한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발언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 성명은 북한이 김정일 위원장의 영결식 뒤 가장 먼저 보인 공식행보였다. 그동안 경색될 대로 경색된 남북관계가 앞으로도 험난한 길을 갈 것임을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해가 바뀌자 북한은 선전공세를 더욱 강화해 나가고 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TV는 1월3일 김정은이 ‘근위서울류경수 제105탱크사단’ 방문 장면을 담은 13분짜리 기록영화를 방영했다. 또 1월11일에는 외교부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국이 대북 식량지원을 정치화한다”며 미국을 맹비난했다. 미국은 김정일 위원장 사망 직전, 고농축 우라늄 포기 대가로 식량지원을 제공하기로 제안한 바 있다.

북한의 선전공세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북한 지도부의 권력이동이 순조로이 이뤄지고 있음과 동시에 북한 권력의 핵심인 군부와 당이 김정은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또 북한이 미국을 맹비난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향후 신뢰구축 의지가 있는지를 지켜 보겠다”면서 대화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는 북한이 강온 양면전술을 사용해 앞으로 전개될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북한 지도부의 권력이동이 순조로이 이뤄지고 있는 건 일단 반가운 일이다. 북한체제의 불안은 동북아 정세 전체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갈 위험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김정일 사후 사태 흐름을 예의주시하던 국제사회는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특히 한반도 정세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은 북한체제의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는 입장이다.

美-中, 김정은 체제 안착에 환영표시

미국은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클린턴 국무장관을 통해 “북한의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전환(transition)을 원한다”면서 “북한의 새 지도부는 한반도 평화, 번영, 항구적 안보를 위한 새 시대를 향해 국제사회와 협력하기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의 내용은 포괄적이었지만 북한체제의 안정을 바라는 속내가 깔려 있었다. 중국은 북한의 안정적인 권력이동에 더 적극적이었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직후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은 한-미-일-러 등 한반도 이해당사국들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을) 자극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또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지난 해 12월30일 북한이 노동당 정치국회의를 열어 김정은을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하자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중국이 북한의 최대 무역파트너이자 주요 동맹국임을 감안해 볼 때 중국의 행보는 당연해 보인다. 특히 북한은 핵 개발 및 미사일 발사실험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로 경제난이 심화됐고, 이러자 중국에 대한 의존을 강화해 나갔다.

그렇지만 중국이 북한문제에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건 전략적인 이유에서다. 바로 북한을 지렛대 삼아 미국의 패권전략에 맞서려는 포석이란 말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국을 “태평양 세력”으로 규정하고 중국의 인접국인 베트남, 버마와의 관계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김정은으로의 권력 이동이 매끄럽지 않게 이뤄지지 않아 최악의 경우 북한체제가 붕괴되고 남한에 흡수통일 될 경우, 중국은 미군이 주둔한 통일한국과 국경을 맞대어야 한다. 이에 중국은 동북아 주변정세 안정은 물론 미국의 극동전략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북한체제의 안정에 발벗고 나서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중국의 움직임에 그다지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입장이다. 오히려 중국측에 북한에 억지력을 행사해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김정일 사후 북한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한-중-일 3개국을 차례로 방문한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1월4일 추이텐카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과의 회담에서 “중국은 북한에서의 사태전개에 미국과 긴밀히 협의해줄 것과 북한의 새로운 지도부에게 자제를 촉구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내심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 북핵해결을 위한 6자 회담에 임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김정은은 준비된 지도자?

북한 지도부의 권력이양이 예상외로 순조로운 흐름으로 전개되면서 김정은의 리더십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김정은은 ‘준비된 지도자’라는 주장이다. 북한의 대외비 문건은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2009년 5~6월 사이 북한군 내에서 학습자료로 사용된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라는 제목의 대외비 문건은 “의미 깊은 2006년 12월 24일,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동지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업증서와 기장이 기여된 자리에서 주체의 선군혁명 위업을 빛나게 이으실 것을 바라시었다”고 적고 있다. 이같은 언급은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 악화되기 이전부터 이미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돼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내부자료인 ‘김정은 교양자료’에 따르면 이미 2009년 상반기부터 김정은의 ‘영군체계(군대에 대한 영도체계)’ 수립을 강조하고 있었다”면서 “김정은이 국가안전보위부장직에 임명된 것은 2009년 3~4월경이므로, 김정은의 군과 공안기관 장악은 2011년이 아니라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서 ‘준비된 지도자’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김정은의 북한은 곧 현실

북한에서 지도체제의 변화가 매끄럽게 이뤄지고 있는 건, 남한의 입장에서는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한반도 정세의 주요 이해당사자인 미국과 중국 역시 안정적인 권력이양에 환영의 뜻을 나타내고 있기에 더욱 다행스럽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북한이 김정일 위원장 사망 후 정부차원의 조문을 문제 삼아 남한쪽과 상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시한 일이다. 남북이 여전히 이념적 대치상태에 있다는 현실을 감안해 북한이 보다 열린 자세로 남한의 입장을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남북관계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놓여 있다. 천안함, 연평도 포격 같은 안보위기가 언제다시 발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새로이 북한의 지도자로 부상한 김정은은 과거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그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은 한국전쟁 발발의 주범이라는 원죄를 짊어지고 있다. 아버지인 김정일은 KAL폭파 테러,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등 남한을 상대로 한 도발 행위를 획책한 장본인이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리고 김정은은 식량난과 국제사회의 핵개발 포기압력 등 북한이 오랫 동안 안고 있는 난제를 처리해야 하는 정치적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어쩌면 김정은은 할아버지, 아버지 보다 더 남한의 도움을 바라고, 그래서 남한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려 할지도 모른다. 이제 공은 남한으로 넘어왔다. 남한이 젊은, 그러나 감당하기에 버거운 과제를 안고 있는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한반도 정세가 화해국면으로 흐를수도, 반대로 혼란으로 빠져들어갈 수도 있다. 이념을 앞세우기 보다,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는 혜안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게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