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적인 판단보다 재벌가 2, 3세에게 일감몰아주기 급급
비판여론 의식해 철수했지만 재진입 시도 배제 못해
재벌의 무분별한 사업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호텔신라는 1월26일 자회사 보나비가 운영중인 커피, 베이커리 카페 ‘아티제’ 사업에서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2007년 홈플러스와 합작해 설립한 ‘아티제 블랑제리’도 정리할 계획이다. 범LG가의 아워홈도 반성장위원회의 자제권고안에 따라 순대, 청국장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밝혔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은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재벌이 기업가 정신을 앞세우기 보다 재벌가 2~3세에게 일감을 몰아주는 성격인데다, 업종이 서민들의 생계와 직결된 유통, 서비스업이라는 데 있다.
아워홈은 故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3남인 구자학 회장 일가가 운영하는 외식업체다. 구 회장의 직계자녀인 본성, 지은 씨 등이 이 회사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다. 이 회사는 분식집에서나 팔 법한 순대와 청국장을 판다. 또 범LG그룹의 주요 구내식당을 운영하며 수익을 올린다. 아워홈은 지난 2000년 LG유통에서 분리독립했음에도, 모그룹에 기생해 수익을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호텔신라는 지난 2004년 외국계 커피전문점에 맞설 토종 브랜드를 육성한다는 명분 하에 유럽형 라이프스타일 카페 아티제를 개설, 운영해 왔다. 2011년 아티제는 청계천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확장에 나서 현재는 27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해 거둔 매출액은 241억원으로 호텔신라 전체매출(1조 7,000억 원)의 1.4%를 차지한다.
호텔신라는 또 2007년 홈플러스와 합작해 '아티제 블랑제리'를 설립했다. 아티제 블랑제리의 운영은 홈플러스가 하고 호텔신라는 레시피 등 기술지도를 맡아왔다. 아티제 블랑제리의 지분 가운데 19%는 호텔신라 소유고, 호텔신라의 대표이사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녀 이부진 씨다.
한편 한진그룹 계열사인 대한항공은 2011년 11월 왕산마리나 조성사업 추진을 위해 왕산레저개발을 설립했다. 왕산마리나 조성사업은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영종 지구 중구 을왕동에 있는 왕산 해수욕장 인근의 공유수면 9만8604m²를 매립해 마리나 시설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사업이 완료되면 요트 300척이 들어갈 수 있는 계류시설과 해상방파제, 클럽하우스 등이 조성된다. 그런대 왕산레저개발의 대표이사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맏딸인 조현아 대한항공 전무가 선임됐다. 또 한진티엔에스, 유니컨버스, 사이버스카이 등 내부거래를 통해 급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계열사의 지분 대부분도 한진그룹 3세들 소유다.
중소상인 위협하는 재벌가 2, 3세
재벌의 몸집 키우기, 그리고 재벌 2, 3세들에게 일감 몰아주기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움직임은 안팎에서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재벌들이 앞다투어 진출한 사업분야가 중소상인들의 영역인 유통, 서비스업이어서 중소상인들의 반발이 특히 거세다.
대기업의 서비스업종 진출 실태를 살펴보면 롯데 신격호 회장의 외손녀인 장윤선 블리스 대표는 프랑스 베이커리 브랜드 ‘포숑’을 수입해 롯데백화점에서 영업중이고, 정성이 현대차그룹 전무는 ‘오젠’이라는 빵집 사업을 벌이고 있다. 또 LG사보텐분식, CJ푸드빌 비빔밥, CJ푸드빌과 매일유업 카레, 대명홀딩스 떡볶이체인 베거백, 농심 뚝배기 등등 재벌계열 요식업체들이 골목상권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재벌, 정부시책에 편승해 몸집 불려
재벌그룹들의 무분별한 행태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 이명박 대통령은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비지니즈 프랜들리’(친기업)를 표방하며 규제완화와 자율 규율을 내세웠다. 정부가 사실상 확장을 부추긴 것이다. 재벌그룹들은 정부의 느슨한 규제에 편승해 중소기업이나 영세 자영업자들의 업종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해 몸집을 불려 나갔다.
지난 해 말 재벌닷컴 집계를 보면 30대 재벌그룹의 계열사 수는 1,150개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30대 재벌기업 계열사는 2006년 731개에서 매년 평균 83.8개씩 증가해 지난 해 말에는 1,150개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롯데와 SK그룹은 5년간 35개씩 계열사가 생겼다. 삼성은 2006년 말 58개에서 지난 해 말 79개로 21개, 현대자동차는 같은 기간 40개에서 55개로 15개가 증가했다.
재벌그룹들의 사업확장 움직임이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부분도 크지 않다. 70, 80년대 경제성장기엔 국민들이 재벌그룹의 팽창에 일정 정도 공감했다. 당시 시대상황은 산업경쟁력 확보가 시급한과제였고, 대기업은 설비사업과 미래사업에 투자해 국민경제에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근 이뤄지고 있는 사업확장은 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공간과 수요를 창출하는 이른바 ‘블루오션’ 개척이나, 해외 기업과의 치열한 경쟁을 통한 가치창출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놀고, 입고, 타고, 먹는’ 사업에 몰두하는 형국이다. 심지어 롯데그룹 총수 3세는 물티슈 사업까지 벌이고 이고 있다.
기업가 정신 고취가 우선돼야
대한민국 재벌그룹의 경쟁력은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와 있다. 대표적인 재벌그룹인 삼성의 경우 국제 경쟁력을 갖춘 제품군을 약 10개 가량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나머지 계열사들은 경쟁력을 갖춘 사업부에 기대어 명맥을 유지하는 실정이다. 다른 재벌그룹들의 상황도 삼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규모의 기업을 재벌그룹을 운영해 나가는데 있어 사업의 전문화와 다각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는 경영적인 판단에 근거해야 한다. 문제는 최근 재벌그룹들의 사업확장 움직임이 경영적 판단 보다는 총수 2, 3세들에게 중소상인들의 존립을 위협하면서까지 돈을 벌어다 주는 양상이라는 것이다.
실제 재벌그룹들이 자금력과 탄탄한 유통망을 앞세워 무차별적으로 진출한 탓에 중소 자영업자들은 설자리를 잃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이하 중기중앙회)의 집계에 따르면 2003년 1만 8,000개 가량이던 제과점이 2011년 말 4,000개로 8년만에 77.8%가 감소했다. 중기중앙회는 다른 업종 역시 사정이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고 있다.
중소 자영업자의 몰락은 국가경제 전반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이들의 몰락은 가계수입 감소와 내수 위축을 불러와 불황으로 이어지고, 결국 대기업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 이와 관련, 중기중앙회는 “1차적으로 대기업에서 소상공인 골목시장 진출을 자제하고 유통서비스 적합업종 지정에 동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들은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경실련은 산업영역을 법적으로 보호해주고 대기업이 침범할 경우 제재를 가하는 한편, 재벌의 내부거래나 몰아주기 관행에 과세와 단속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종 특별법(가칭)’을 제안한 상태다.
비판여론 비등하자 정부가 나서
재벌그룹들의 무분별한 사업확장 움직임의 부작용이 커지자 급기야 정부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은 1월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기업들이 소상인공들의 생업과 관련한 업종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재벌그룹들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호텔신라는 이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진 바로 다음 날인 1월26일 제과, 커피 사업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아워홈도 순대, 청국장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의 사업철수 명분은 상생이다.
호텔신라측은 “지난해 말부터 아티제 사업철수를 고민해 왔다”면서 “대기업의 영세 자영업종 참여와 관련한 사회적 여론에 부응하고 상생경영을 실천한다는 취지에서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아워홈 측도 “그동안 투자해온 최신 설비 및 영업에 대한 손실이 불가피하지만 상생협력에 적극 동참한다는 취지에 따라 사업철수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재벌의 재진입 시도 배제할 수 없어
호텔신라와 아워홈이 사업철수를 선언하자 다른 재벌계열사들도 뒤를 잇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1월27일 양재동 본사와 제주 해비치호텔에서 운영 중인 구내 카페 '오젠'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오젠은 정몽구 회장의 딸인 정성이 씨가 고문으로 있다.
롯데그룹은 베이커리 사업(포숑) 중단여부를 놓고 고민중이다. 그룹측은 일단 백화점 7곳에만 매장을 두고 있어 골목상권 침해 문제는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그러나 여론을 의식해 장 대표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재벌그룹들의 사업철수 도미노가 이어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다. 애경그룹은 일본 치카라노모토사와 제휴해 일본 라면체인 ‘잇푸도’를 운영하는 한편, 일본 카레 브랜드인 ‘도쿄하야시라이스클럽’도 들여왔다. 농심그룹은 일본에서 카레식당 브랜드 ‘코코이찌방야’를 들여와 영업중이다.
이런 탓에 재벌들의 골목상권 진출을 비난하는 여론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재벌그룹들의 골목상권 침투로 인해 생존을 위협 받았던 중소 자영업자들의 분노는 여전하다. 이들은 한결 같이 상생을 고민했다면 애초부터 확장에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고 입을 모은다. 또 일부 재벌계열사들의 사업철수 선언도 이미지 관리 차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세상인들의 주장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설득력이 강하다. 지난 해 12월30일, 국회는 중소기업의 사업영역 보호를 규정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에 따르면 서비스업은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이 가능하다. 또 비슷한 시기 동반성장위원회는 순대·청국장 사업을 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결국 재벌그룹들의 철수 선언은 정부의 제도적 압박과 비판여론을 의식한 결과인 셈이다.
중소 영세상인들은 일단 안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는 눈치다. 재벌그룹들이 자금력과 기존에 확보된 유통망을 이용해 언제든 재진입을 시도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룹총수의 2, 3세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심어주기 보다 손쉽게 돈벌이를 시켜주는 재벌그룹들의 관행이 개선되지 않으면 이 같은 우려는 언제든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