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디바이스의 습격, 그러나 종이책은 건재할 것”
인쇄업의 백전노장이 이야기하는 21세기 인쇄업의 현황과 전망
“종이책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도서 분야도 다르지 않다. 전자책의 표준으로 불리는 E-Book을 필두로 각종 스마트 기기를 활용한 도서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일각에서는 10년 이내에 ‘종이책’의 소멸을 예견하기도 한다.
“점유율이 다소 줄어 들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종이책의 완전한 소멸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아날로그 디바이스를 잃어버린 음악과는 다른 성질입니다. 책은 지식의 근원이며, 또한 이 세상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그 속에 담긴 글자를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일문화사 조병갑 대표의 표정은 사뭇 여유로워 보였다. 1970년 동아출판사와 관련된 인쇄업으로 종이책과의 인연을 맺은 조 대표는 고희를 훌쩍 넘긴 인쇄업계의 백전노장이다. 그가 이끌고 있는 국일문화사 역시 1984년 설립한 후 올해로 꽉 찬 이립(而立)을 한 해 앞두고 있다.
“표지의 색감과 질감을 살피고, 목차의 밀도와 종이와 인쇄상태의 깊이를 살피는 것부터 독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아주 느린 호흡으로 책장을 한 장씩 넘기는 것 또한 독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지요. 특히 책장을 넘길 때의 사각거리는 소리는 묘한 성취감을 느끼게 하지요.”
물론 전자책도 종이책 못지않은 ‘독서감’을 선사하고 있다. 유명 태플릿PC의 경우 종이책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디자인을 갖추고 있으며, 심지어 책장을 넘기는 퍼포먼스와 그 소리까지 보여주고 있다.
“흉내일 뿐입니다. 아무리 비슷하게 꾸며놨다고 해도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조병갑 대표는 책으로 가득 찬 방을 예로 들었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 혹은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여 있는 그 지식의 묶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자책이 아무리 발전해도 종이책을 따라잡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그 책방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나이를 먹지요. 사람이 그러하듯 책도 나이를 먹습니다.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고, 특유의 향기를 풍기게 되지요. 그것은 독서의 또 다른 풍미를 자아냅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전자책이라고 해도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죠.”
책 향기가 나는 남자, 그 희망의 메시지
이미 은퇴를 하고도 남을 고희의 연배(조 대표는 올해로 74세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그는 50여 년 이상 앞만 보며 일만해 온 까닭에 선뜻 일터를 떠나기가 어색하다고 말했다. 젊어서 잠시 건축업과 군납업쪽 관련된 일에 몸담았던 경험이 있어서 생활리듬이 ‘일’에 완전히 맞춰진 까닭이라고 했다. 한 평생 그는 ‘일’과 ‘사람’을 이끌었던 탓에 그가 갑자기 멈추면 그것들에게 밟혀버릴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조 대표에게서 아련하면서도 은은한 책의 향기를 느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낱장의 종이가 두툼한 한 권의 책으로 제책되고,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사람의 손길과 애정을 잔뜩 묻힌 낡은 책 한 권. 국일문화사 조병갑 대표는 그런 낡은 책 같은 사람이었다. 낡았다는 표현이 쓸모없거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세월의 힘으로 다져진 깊이와 향기를 일컫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그 책을 닮은 조 대표는 한 사람이 세상을 더욱 풍요롭고 향기롭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장항동기업인협회가 그 통로다.
“지역 안에 1,500여 개의 중소기업들이 있습니다. 업체당 2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고 가정해 볼 때 대략 10만여 명의 가족들이 기업에 생계를 의탁하고 있는 셈이죠. 이 어마어마한 지역경제 인프라가 너무 낙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협회 일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일대에서 ‘장항동기업인협회’는 책장의 소리처럼 소문으로 떠돈다. 한편으로는 오래된 책이 피워내는 향기처럼 피어나고 있다. 지역 어르신들을 모시고 조촐한 잔치를 펼치기도 하고, 좁은 도로 탓에 만성적인 주차난에 시달리고 있는 지역주민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힘’을 쓰기도 한다
조 대표의 국일문화사가 디지털 물결 속에서도 거침없이 종이책을 묶어내는 것처럼 그의 장항동기업인협회도 끊임없이 지역과 사람들을 묶어내고 있었다. 그가 행하는 ‘묶음의 울타리’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노소를 따지지도 않는다. 조촐한 식사 대접으로, 혹은 지역 내 어려운 가정의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모습을 달리해 드러난다.
“지식의 근원이 책이라면, 삶의 근원은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즘 참 힘든 시절을 살아가고 있지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실업률 통계를 볼 때마다 가슴이 스산해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틈 날 때마다 외국을 방문합니다. 지금까지 40여 개국을 방문하며 느낀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대한민국의 저력이었습니다. 외세의 침탈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것이 불과 6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그 시절과 비교해 봤을 때 실로 놀라운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현재의 고비를 잘 넘긴다면 우리는 더욱 크고 탐스러운 행복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온통 원망과 한탄이 가득한 이 시대에 국일문화사 조병갑 대표로부터 뜻하지 않았던 희망의 메시지를 들었다. 이는 치기와 열정으로만 가득한 젊은이의 무책임한 ‘화이팅’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신뢰가 갔다. 한 평생 책을 만든 남자. 그가 만든 책에 담긴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이 삶의 연륜이라는 향기로운 바람으로 불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조병갑 대표는 아직 현역이다. 따라서 디지털 혁명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이 시대에 종이책의 존재와 가치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그가 이야기하는 희망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