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여 년 만에 깨어난 비운의 파라오 투탕카멘
투탕카멘의 관에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 글귀 새겨
1922년 1월3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 박사가 고대 이집트왕 투탕카멘의 묘를 발굴했다. 발굴을 후원한 영국의 카나번 백작은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기 직전 모기에게 물려 목숨을 잃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를 투탕카멘의 저주라고 믿었다. 하지만 대부분 파라오의 관에 적힌 ‘죽은 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라는 글귀와 달리 투탕카멘의 관에는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1922년 1월3일]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 발굴
투탕카멘은 BC 1361년 9세의 나이로 이집트의 파라오에 등극해 18세에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재위했다. 이 때문에 그렇다 할 업적도 없어 후세의 파라오에 의해 그의 기록은 점점 사라져 갔다. 더욱이 람세스 2세가 많은 신전에 조각한 왕명표에도 투탕카멘의 기록은 없다. 특히 투탕카멘왕의 묘 위에 람세스 6세의 묘가 만들어졌는데 람세스 6세의 무덤은 파헤쳐졌지만 덕분에 매장된 곳을 기록하지 않은 그 밑에 잠들어 있는 소년 왕의 무덤은 3,000년 이상이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00년경 왕가의 계곡의 발굴을 승인받은 미국인 시어도어 데이비스가 람세스 3세의 무덤 근처에서 투탕카멘의 이름이 기록된 도기와 인장을 발견했다.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이 자료를 보고 미지의 왕 투탕카멘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리고 1922년 1월3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 박사가 룩소르 부근 나일강 서안의 ‘왕가의 계곡’에서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 투탕카멘(재위 BC 1361∼BC 1352)의 묘를 발굴했다.
그런데 발굴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이유 없이 사망하는 불행이 잇따랐다. 1923년 하워드 카터와 함께 이 무덤을 발굴했던 카나번이 모기에 물려 죽은 걸 시작으로 무덤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 13명이 원인불명의 병이나 자살 등으로 세상을 뜨자 급기야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생겼다.
투탕카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이집트 왕릉으로 발굴 당시 투탕카멘의 무덤에선 110㎏짜리 황금 관(棺)과 황금마스크(11㎏) 등 호화찬란한 금은보화와 합금되지 않은 철, 마르지 않은 향료 등 2,000여 점의 귀중한 유물이 3,000여 년이 넘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묘 앞방에서는 사자모양의 침대를 비롯한 가구 여러 점이 나왔고, 관을 들여놓는 현실(玄室)에서는 키 168㎝ 왕의 미라가 여덟 겹으로 싸인 채 안치돼 있었다. 또 이집트 왕의 사냥, 전쟁 모습이 담겨 있지만 직접 원정을 이끌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근친 간의 혼인에 의해 태어난 데다 골질환과 선천성 내반족이 있어서 걷기가 아주 힘들었으며 언어 장애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터가 카이로박물관에 소장시킨 발굴품은 1,703점으로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예술,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유물로 평가됐다. 투탕카멘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 마스크를 비롯한 3,000여 점의 부장품들은 현재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무덤 안에는 현실 정면 벽화와 관이 있고, 그 안에 투탕카멘의 미라가 잠들어 있다. 투탕카멘왕의 무덤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다.
한편, 2002년 9월엔 미국의 전 연방수사국(FBI) 요원과 유타 경찰국 범죄분석 반장으로 구성된 미국 연구팀이 투탕카멘 미라의 X선 촬영 사진과 무덤 내부 형태 등을 정밀 분석한 결과, 타살이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1987년 1월14일] 박종철 군 고문 치사, 6월 민주항쟁 불씨 지펴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서울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수배를 받고 있던 친구의 소개를 추궁당하다가 수사실에 딸린 욕조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숨졌다. 치안본부는 수사관이 조사과정에서 책상을 ‘탁’하고 치자 박종철 군이 ‘억’하더니 갑자기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부검의의 증언으로 사건발생 5일 만에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심증을 굳히게 하는 부검의 의 증언으로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은 2차 수사발표를 통해 고문사임을 인정했다. 박 군의 사인이 드러나면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경찰은 박 군을 고문했던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사건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신민당은 정부여당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였으며, 재야단체들은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는 한편, 각계인사 9,000명으로 구성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등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정국은 고문정권규탄 및 민주화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이에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을 통해 치안감 박처원과 경정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했고, 고문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 폭로로 서울지검은 6명을 추가 구속했고, 정부는 주요 인사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경찰과 검찰의 사건은폐조작 시도는 정부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국무총리 등 정부 주요 인사 8명이 경질됐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된 일련의 추모집회와 규탄대회는 개헌논의와 연결되면서 6월 민주화 항쟁의 불씨를 지폈다.
[1968년 1월21일] 1.21사태, 북한 특수부대 서울 침투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 지령을 받고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침투했다.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31명은 그 해 1월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에게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했다. 서부 전선의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하여 하룻밤을 숙영(宿營), 19일 밤 8시30분경 임진강의 얼음판을 횡단, 당시 경기도 고양군 법원리의 삼봉산(三峰山)에서 2일째 숙영을 한 다음,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僧伽寺)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이날 밤 10시 서울시내 세검동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르렀다.
북한군들은 서울 세검정고개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경찰의 검문에 걸리자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한 뒤 달아났다.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총경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 1발을 던져 많은 승객들이 숨졌는가 하면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이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되었다. 이들이 장비한 습격용 무기는 기관단총(PPS) 31정(1인당 1정씩 휴대), 실탄 9,300발(1인당 300발씩 휴대), TT권총 31정(전원 휴대), 대전차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방어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단도 31정(전원 휴대)이었다.
군경합동수색대는 10일 동안 수색작전을 펼친 끝에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그러나 2명은 끝내 잡지 못했다. 생포된 김신조는 한국으로 귀순했다.
북한 민족보위성은 김일성(金日成)의 이른바 ‘항일빨치산전술’을 근거로 하여 대남적화공작에서 적극적인 유격전 활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결정, 1967년 4월 정찰국 산하에 유격전 특수부대인 ‘제124군부대’를 조직했다. 이 특수부대는 일반 군부대에서 선발된 척후병·통신병·운전병·특무장(特務長) 등과 제283군부대 및 집단군 도보정찰소에서 엄선된 정예병 2,4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연산(延山)과 상원(祥原) 일대의 8개 기지에 300명씩 분산되어 훈련을 받았으며, 특수교육의 내용은 적배치상황이론, 지뢰 극복을 위한 정찰병 기본 동작, 지형학, 사격, 침투훈련 등이었다.
1968년 1월2일 민족보위성으로부터 청와대·미대사관·육군본부·서울교도소·서빙고 간첩수용소 등을 일제히 습격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제6기지 유격대는 장교 25명의 유격대원을 엄선해 그 해 1월5일부터 황해도 사리원으로 이동, 노동당 도당청사를 청와대로 가상하고 청와대 정문 사진과 전경 사진을 익히면서 습격훈련을 실시했다. 1월13일 정찰국장 김정태는 이 훈련장소를 방문, 독려하면서 습격 대상을 청와대로 지정했다.
정부는 사태가 발생한 다음날 국회국방위원회에 사태의 진상을 설명했다. 1월24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261차 군사정전회의 본회담에서 유엔군측 수석대표는 푸에블로호사건과 함께 북한 게릴라 부대의 서울 침투와 그들의 민간인 살상 등 만행을 규탄했다.
북한측은 한국이 휴전 당사자가 아니므로 1.21사태는 본회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등 무리한 답변으로 그들의 만행을 호도했다. 그러나 1970년대 남북대화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이 사태가 좌경 극렬분자의 행동이었음을 시인했다.
정부는 1.21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1968년 1월23일] 북한,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
승선인원은 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2명 총 83명을 태운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납치됐다. 납치된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조한 해군 정보 수집 보조함으로 중량 906톤, 길이 54m, 너비 10m, 시속 12 2노트에 구경 50㎜ 기관포 2문을 갖춘 비무장 함정으로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나포됐다. 김신조(金新朝)를 비롯한 북한 무장 비정규군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가 일어난 지 이틀 뒤의 일이었다. 이날 푸에블로호는 동경 127° 54′, 북위 39° 25′ 공해상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1시45분경, 무장한 4척의 북한 초계정과 미그기 2대의 위협하에 원산항으로 강제 납치되었다. 미 해군 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미 해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8년 1월23일 정오경 1척의 북한 초계정으로부터 첫 공격을 받았으며 14시32분에는 “엔진이 모두 꺼졌으며 무전연락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원산항으로 끌려간다”는 최종보고를 송신했다.
푸에블로호는 1월23일 정오경 1척의 북한의 초계정으로부터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북한 함정은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 해군은 “공해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했다. 약 1시간 후 북한 함정의 지원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도착해 포위했다.
북한 미그기들이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한 초계정이 접근했고 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했다. 이때가 12시40분이었다. 푸에불로호는 “무력 저항을 하지 않았다”면서 원산항으로 끌려간다고 보고했다.
사건 다음 날인 1월24일, 미국 측은 오전 11시 판문점에서 군 사정전위원회 본회의를 열어 1.21 사태와 함께 이 사건을 신랄히 규탄했다. 미국은 소련을 통한 외교교섭과 함께 판문점회담을 추진했으나 소련이 중재를 거부하고 북한도 강경한 태도를 보여 푸에블로호의 송환교섭은 난항을 거듭하게 된다.
25일, 급기야 해공군의 예비역 1만 4,000여 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대에 대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위해 나갔다. 28일에는 추가로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킴으로써 한반도의 위기상황이 고조됐다. 이 사건은 28차례에 걸친 비밀협상 끝에 미국은 푸에블로호의 북한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사과한다.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23일, 승무원 82명과 시체 한구가 판문점을 통해 송환됨으로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은 매듭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