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무풍지대에서 꿈꾸는 이회창의 노림수
보수대연합으로 2012년 대권 노린다
어느새 계절은 가을을 넘어 겨울에 진입하고 있다. 추수가 끝난 들녘에는 싸늘한 바람이 감돌고 오색 단풍으로 아름다움을 자아내던 산에는 앙상한 겨울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람들의 일을 도모하는 정치권에도 계절이 있다. 각종 선출요직의 임기가 끝나가고 새로운 선거가 준비될 무렵은 정치의 가을이라 할 만하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공세가 안개처럼 피어나고 새로이 등극하는 인물들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무지개처럼 피어난다. 그 화려함과 분주함이 가을 속의 가을을 닮았다. 그런데 2011년 11월부터 대한민국 정치권은 이른 겨울에 진입했다. 총선까지는 5개월, 대선까지는 1년이 남았음에도 유난히 계절이 빠르게 바뀌고 있는 탓이다. 이는 분명 정치권의 기상이변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정치의 계절
살아있는 권력,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그의 정부는 이미 무기력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모한 단독 돌발행위와 그로 인해 촉발된 10.26재보선의 대패, 그 와중에 터져 나온 내곡동 사저논란, 한미FTA 비준안의 국회통과 지연 등으로 이미 레임덕이 시작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당청관계에 있어서도 상당부분 추동력을 잃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급기야 여당 내 쇄신파 의원들로부터 대통령의 사과, 국정기조의 변화, 국민과의 소통강화 등을 요구받기에 이르렀다. 이 대통령의 탈당권유에 대한 풍문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렇듯 살아있는 권력의 휘청거림 사이로 향후 권력을 대체할 신진세력들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일찌감치 대세론을 굳혀놓은 채 침묵과 잠행을 이어가던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행보가 심상치 않고, 시민운동가 출신의 박원순 신임 서울시장의 등장과 함께 화려하게 등장한 안철수 서울대 교수의 지지율도 나날이 상승하고 있다.
이와 함께 ‘연대의 힘’을 몸소 학습한 야권은 통합과 연대의 기치를 내걸고 ‘하나’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나, 야권에는 유독 인물이 많다. 정당과 정파를 초월하자면 대선의 하마평에 오르는 인물만도 10여 명이 넘는다.
지난 9월초, 서울시장 출마의지를 밝히며 화려하게 등장한 안철수 교수가 단연 선두주자다. 그는 “출마를 고민하고 있다”는 말 한 마디로 자그마치 50%의 지지율을 단숨에 거머쥐었다. 지난 4년 동안 줄곧 압도적 1위를 구가하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잠깐 동안 앞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안 교수는 이른바 ‘아름다운 양보’로 불리는 야권단일화를 통해 5%의 지지율에 불과했던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서울시장 후보직을 조건 없이 내놓았다. 그의 결단과 야권의 집중을 통해 우리는 어느 정당, 정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순수 ‘시민사회세력’ 출신의 서울시장을 만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이는 박원순이라는 시민운동가의 승리라기보다는 안철수로 상징되는 ‘대안세력’의 승리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기존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의 바로미터이자, 신선하고 이성적인 정치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갈망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 뒤로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손학규 민주당 대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김두관 경남도지사, 한명숙 전 총리가 지지율 다툼을 벌이고 있다. 여권에서 우려하는 바와 같이 안철수 교수를 중심으로 범야권이 단일화를 이룰 경우 그 파괴력과 파장은 역대 최고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대세론, 언제까지 갈까
이에 비해 여권의 분위기는 지나치게 썰렁하다. 지난 대선 이후 여권 내 후계구도는 ‘박근혜’라는 단일 아이콘으로 유지돼 왔다. 40%대 지지율을 유지하며 난공불락의 대세론을 굳혀왔던 것이다. 물론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비롯해 여권 내 대권주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범야권에서 일고 있는 치열함에 비하면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뿐이다.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의존도가 그만큼 지대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9월초 안철수 교수의 등장으로 인해 이른바 박근혜 대세론은 위기에 봉착했다. 아직 붕괴나 몰락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이르지만, ‘위기’라는 점에서는 여권 내부는 물론 친박계에서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안 교수는 파격적인 후보단일화 이후 서울시장 선거기간 중 보여준 ‘편지정치’ 그리고 1,500억 원 상당의 주식에 대한 사회환원 선언 등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박근혜, 안철수의 일 대 일 구도에서는 박빙의 지지율 승부를 벌이게 됐다.
문제는 안 교수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정치무대에 데뷔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내년 총선 출마설, 대선 지지설, 대선 직접 출마설 등 각종 풍문만 난무할 뿐 이렇다 할 직접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떤 형태로든 정치권 진입을 선언하게 될 경우 그 시너지 효과는 몇 배의 파괴력을 가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른바 안풍(安風)은 뇌관이 터지지 않은 폭탄에 가깝다는 평가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박 전 대표에게 불리한 구도다. 어쨌든 안 교수를 중심으로 한 범야권이 공격진영을 갖추고 있으며, 4년 간 독주해온 박 전 대표 및 여권은 수비진영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의 실정과 불통이 더해져 여권은 더욱 어려운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셈이 됐다.
여권에 필요한 것은 화려한 ‘잔치’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여야가 각각 개최하는 행사나 집회에 참석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현 정국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는 한미FTA 집회만 보더라도 그 단면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행사나 집회 때마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5당 대표들이 총출동해 지원연설을 하고 있으며, 각종 시민단체들까지 합세하여 집회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듯 하다. 이에 비해 여권의 행사나 집회장은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그나마 청중 동원력이 있는 박 전 대표가 참석하는 자리 말고는 축제의 느낌은 전혀 없다. 다만, 내년도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직 국회의원들이 찍어 놓은 눈도장, 발도장만 가득할 뿐이다.
이러한 대조적인 분위기는 대선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내년도 총선에서 극명하게 엇갈릴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의 범야권이 추진하고 있는대로 범야권 통합이나 연대가 이뤄질 경우 야권에는 그야말로 ‘인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될 가능성이 높다. 유권자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단순한 인원수 싸움이 아니라 ‘선택의 폭’을 넓히는 풍성함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점에서 향후 여권이 필수적으로 보강해야 할 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박 전 대표 독주체제라는 단순 프레임에서 벗어나 보다 많은 주자들을 발굴하고 내세우는 일이다. 현재로는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적극적인 대시를 보이고 있지만, 10.26재보선 과정에서 야권이 만들어 놓은 ‘구세대-신세대’ 프레임이라면 김 지사 역시 훌륭한 대안일 수 없다.
최근에 와서 한나라당이 외부인사 영입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오죽이나 급했으면, 두 달 전 세금신고 누락으로 잠정은퇴를 선언한 강호동 영입설까지 흘러 나왔을까.
그렇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여권은 한나라당이라는 울타리를 허물고 범여권 및 범보수를 결집시킬 수 있는 ‘멍석’을 깔아야 한다. 이미 상당부분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박근혜 대세론에 대한 돌려막기보다는 파격적이고 전향적인 새 질서로 여권과 보수를 아울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범야권이 키워나가고 있는 축제의 장과 동일한 구도를 만들어 놓기만 하면 된다.
정치무풍지대, 이회창에 대한 주목
이회창 자유선진당 전 대표는 지난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잇따라 패배하고 한 차례 정계를 은퇴했다가 재등장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토양이었던 한나라당을 벗어나 보수권의 변방에서 자신의 정치이력을 쌓아왔다.
그는 최근에 와서 국민중심연합과 이인제 의원 등과의 통합을 도모하며 충청권에 기반한 보수의 힘을 차근차근 쌓아오는 중이다. 그가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후 각종 미디어에 노출되는 빈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저력은 더욱 커졌다는 평가다.
총선과 대선이 가까워 올수록 한나라당은 이 전 대표가 가진 보수적 자산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박 전 대표와 김 지사를 제외하고 마땅한 경선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회창 전 대표의 합류는 상당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이 도래한다면 한나라당은 범여권 단일화라는 ‘잔치상’을 차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야권이 고민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각 당의 후보를 선출하고 2차 경선을 통해 후보를 낼 것인지, 아니면 범보수 정당의 합당을 통해 후보를 낼 것인지 선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권이 보다 화려하고 풍성한 잔치판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당내 경선 프레임에서 과감하게 탈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당시 군소 후보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고, 본선에서 당선시킨 국민경선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박근혜, 김문수, 이회창 등 범보수를 아우르는 쟁쟁한 후보들이 당내 경선이 아닌 국민경선제를 통해 후보를 선출하게 된다면 야권에 버금가는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범여권 국민경선이 이뤄지게 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아마도 박근혜 전 대표가 맥없이 선출되는 사태는 없을 것이다. 비록 지지율에 있어서는 여전히 난공불락의 40%대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 박 전 대표에 대한 본격 검증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박 전 대표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한 ‘콘텐츠 부족’도 해결되지 않았다.
더구나 10.26재보선에서 확인된 기존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을 되뇌어 본다면 박 전 대표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여권에서 한 발 물러선 채 특유의 꼬장꼬장 입담으로 쓴소리를 뱉어온 이회창 전 대표가 더욱 유리할 수 있다. 탈당과 동시에 여당의 기득권을 잃게 됐지만, 순수 보수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패배했다고는 하나 지난 두 차례의 대선을 통해 충분히 검증된 인물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가장 큰 흠결이자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병역문제’는 네거티브의 요소로 단물이 다 빠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회창 전 대표가 참여하는 범여권, 범보수 국민경선이 이뤄진다면 의외의 이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
“총선은 각개전투, 대선은 보수대연합”
지난 10월31일 이회창 전 대표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차기 총선에서 보수대연합이 불가능하지만 대선에서는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총선이 끝나고 대선 정국으로 가면 보수연합이란 말이 나올 수 있다”며 “보수연합은 한나라당 중심의 줄 세우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세력이 노무현 정부 같은 좌파 정권 출현을 막기 위해 연대하고 힘을 모으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총선에서는 보수대연합이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서는 “총선이란 것은 지역구 쟁탈전인데 무슨 보수연합이 있을 수 있냐”는 입장을 밝혔다. 이 전 대표는 민주당 등 기존 정당과 시민사회단체가 힘을 모으고 있는 야권대통합에 대해서는 “이념이나 정체성의 공감은 없고 당선 하나 따내기 위해 하는 거래”라고 일축했다.
그의 이러한 발언을 액면 그대로 풀이해 보자면 앞서 언급했던 2012년 선거 시나리오를 어렵지 않게 추리해낼 수 있다.
즉, 자유선진당 단독의 총선을 통해 충청권 의석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나라당과 대선 연합을 하는 데 있어서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겠다는 의지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보수성향의 유권자들이 가지고 있는 현 정부와 여권에 대한 불신을 감안한다면 충분한 의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기반으로 대선주자로서의 몸값 또한 상당부분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수의 변방에서 정치무풍지대를 떠돌던 이회창 전 대표의 행보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