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인 고성에 시조의 텃밭을 만들고 싶습니다”
상태바
“고향인 고성에 시조의 텃밭을 만들고 싶습니다”
  • 김태인 차장
  • 승인 2014.01.02 17: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퇴색되어 가는 우리 고유의 시조에 활력을 불어 넣을 터

우리 민족이 만든 독특한 정형시의 하나인 시조. 시조는 조선조 일대를 이어온 대표적인 노래였으며 작품수가 2천에서 5천에 이를 만큼 거대하다. 시조를 노래 부른 방식은 15~16세기 까지 가곡의 대엽조(大葉調)에 의지하였고 17세기 이후 가곡의 여러 가지 변태가 생기는 것과 함께 ‘시절가조(時節歌調)’라는 새로운 취행의 악곡이 생기면서 거기에 맞추어 즐겼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고유 문화인 시조가 점점 퇴색되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고향에서 시조의 활성화를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인 이가 있다. 늘봄예술촌의 김숙선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우리 민족이 만든 독특한 정형시인 시조(時調)

▲ 늘봄예술촌 김숙선 대표
시조는 명조 때의 명창 이세춘이 칭한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준말로, 고려 중기에 형성되어 고려 말엽에 완성되어 현재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학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엄청난 수난을 겪은 시조는 고전 시가의 한 장르로 보기도 하지만 ‘혈죽가’라는 시를 계기로 해서 그 다음부터 계속 쓰이고 시조 부흥운동 등을 통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시조는 원래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준말이에요. ‘때 시’자를 쓰거든요. 때에 맞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옛것만 고집하다 보면 독자가 사라지잖아요. 시대에 맞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되 시는 운율이나 형식이 조금 자유로움에 비해 시조는 율격이 정형화 된 것입니다. 특히 시조는 시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시에 비해서 어렵습니다. 일단 시조는 언어가 잘립니다. 시는 할 말 다하면 되지만 시조는 정해진 율격과 군더더기를 자르기 때문에 압축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습니다.”
특히 시조는 형식이나 운율이 매우 안정적이고 단아하여 유학자나 사대부들이 그들의 사상과 감정을 절제하여 표현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서정 갈래였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3음보 중심이었던 고려 속요가 주도권을 상실하고, 4음보 중심의 시조가 새로운 주도적 시가 형식으로 자리 잡아 가는 우리 시가사의 변모과정은 시가의 주된 담당 계층이 서민층에서 사대부층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과 맞물려 있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에게서는 발랄하기는 하지만 사물을 깊이 있게 추구하기에 부적당한 3음보의 노래보다는 균형감과 안정감이 있는 4음보의 노래가 그들의 사고방식에 더 적합했던 것이다. 그 후 우리고유의 ‘얼’인 시조는 3장 6구 12음보로 함축하여 가곡으로도 불리고 있다.
“우리와 문화가 비슷한 일본의 경우, 하이쿠라는 것이 있는데 하이쿠는 외국에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비해 시조는 아직 인지도가 낮은 편입니다. 때문에 우리 국민 모두가 시조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고유 문학인 시조를 재평가하다

▲ 김숙선 대표의 등단 작품인 ‘등나무
어릴때부터 유난히 글쓰는데 남달랐던 김숙선 대표는 풍류를 즐기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글쓰는 것에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사람은 글을 알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내의 또래들을 모아서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어린 시절 남들과 달리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집 안 별채에서 글을 모르는 또래의 친구들을 모아서 국어와 산수를 가르쳤다. 당시 교육장이 그런 그의 모습을 대견히 여겨 분필과 석유 등을 제공해주기도 했었다고. “또래 친구들을 가르치면서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야만 성공을 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깐요.” 성공을 해서 50세가 되는 해에 모교를 위해 장학금을 전달 할 것이라는 결심을 한 김 대표. 당시 그는 15세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5세의 나이에 한 결심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그의 나이 50세가 되던 해, 모교에 장학금을 전달했다고 한다. “어릴 때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화장을 했습니다. 그때 화장을 하는 것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화장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그 무언가가 제가 시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제1회 늘봄예술촌 시조문학 백일장
이 후 외할머니 작시를 ‘안녕하세요, 황인용 강부자입니다’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시를 보냈었는데 그 시가 채택되어 라디오 방송까지 출연해 시 낭송을 하게 된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우연히 짚 앞뜰에 있는 등나무를 보고 지은 시인 ‘등나무’. 결국 이 한편의 시로 인해 김 대표는 61세의 나이로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여러 다양한 시를 짓던 중 2010년에 ‘그리움의 창’이라는 첫 시조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고향인 고성에 시조의 텃밭을 만들고 싶습니다
고성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결혼생활을 하다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며 시조문화의 저변확대와 활성화를 갈망하고 있는 김숙선 대표는 지난 11월에는 고성군 초등학생들의 문학적 소양함양과 시조능력 배양을 위한 ‘제1회 늘봄예술촌 시조문학상 학생백일장’ 대회를 개최 했다. 이날 백일장에는 고성초등학교, 대성초등학교, 철성초등학교, 사천초등학교 학생 120여명이 참가해 ‘엄마’와 ‘구름’이라는 시제로 실력을 겨뤘다. “우리 고유의 문학인 시조를 알리기 위해 관내 4개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생백일장을 개최 했습니다. 행사를 준

▲ 늘봄예술촌 갤러리 내부

비하면서 학생들이 많이 참가하지 않을까 다소 우려도 했지만 많은 분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해 주어서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날 행사에 이우걸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이 참석해 축사와 심사위원장으로 고성 지역의 시조문화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제1회 늘봄예술촌 시조문학상 학생백일장’ 행사비를 고성문화원에서 모시꽃 강의를 통해 받은 수당 전액을 포함한 개인 사비를 들여 행사를 개최해 재능기부의 모범으로 지역사회에서 극찬을 받기도 했다.
“‘제1회 늘봄예술촌 시조문학상 학생백일장’이 고성군 학생들에게 시조문학을 알리는 도화선을 하는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시조문학이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가운데 고성에 ”우리의 얼“의 씨앗을 뿌려 ‘예술의 고성’이라는 밭을 일구고 싶습니다”라고 전하는 김숙선 대표. 그의 바람처럼 지금은 비록 걸음마 단계이지만 그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우리 고유의 문학인 시조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김숙선 대표의 행보에 기대해본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