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동화] 금지의 처방전
상태바
[어른들을 위한 동화] 금지의 처방전
  • 편집국
  • 승인 2017.05.10 14: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순수성은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고되고 바쁜 삶을 살아가면서 그 마음을 잃었을 뿐 내면 깊숙한 곳엔 잃어버린 순수성이 잠들어 있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고 즐겁다. 본지는 어린이 책 작가교실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한 편씩을 소개해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으로 바라 본 세상을 전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바쁜 일상으로부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가지길 바란다. <편집자 주>

금지의 처방전

최수영

 

수십만 군중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집회를 하고 있는 영상이 쉼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더 이상 이대로 살 수 없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TV 속과 내가 사는 세상은 영 다른 세상이었다.

“애앵 앵앵.” 사이렌 소리가 우리 집을 통째로 흔들어댔다. TV를 통해 엄마, 아빠 곁에서 촛불을 들고 서있는 아이들을 응시하던 나는, 집 앞에 하얀 응급차를 본 후 아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는 안방에 널브러져 간간히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술을 마신 탓이다. 소파에 힘없이 기대있는 엄마를 보았다. 어제 밤 아빠 모습이 기억나 양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가슴이 쾅쾅 뛰었다. 엄마가 소파에서 힘없이 일어나 현관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열린 문틈으로 몸집 큰 아저씨들이 보였다. 엄마가 떨리는 손으로 아빠를 가리켰다.

“황금식씨. 황금식씨, 정신 차려 보세요.”

“이야, 이 새애끼이드을아, 뭐야, 뭐하자느은거야.”

혀가 꼬인 채 정신없는 아빠는 눈도 못 뜨고 고래고래 욕을 해댔다. 아저씨들은 아빠를 우악스럽게 양쪽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응급차로 억지로 끌고 갔다. 아빠는 어디로 가는 걸까. 엄마가 아빠와 함께 응급차를 타고 사라졌다.

다음 날.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아래층에 사는 도흔이 녀석이 뒤에서 은근슬쩍 따라 붙었다.

“야, 황금박지! 너희 집에 하얀 차 온 거 다 봤다.”

“…….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무섭게 쏘아붙이자 도흔이는 손을 내저으며 얼버무렸다.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 친구들이 놀려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일 년 전. 아빠가 일하던 자동차 정비가게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 우리 가족에게 닥친 가장 힘든 일이었다. 아빠는 동네 포장마차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처음에는 그게 아빠에게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집에서 까지 술을 마셨다. 그렇게 시작하면 1주, 2주 연달아 쉬지 않았다. 그럴 때는 내가 알던 아빠가 아닌 것 같았다.

“그으음쥐이이야, 수우울 사아와아라아.”

“그렇게 먹고 싶으면 아빠가 나가서 사와. 미성년자한테는 술 안파는 거 몰라?”

아빠가 정신이 번쩍 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아빠는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향해 베개를 내던졌다. 베개로 얻어맞은 방바닥은 괜찮았지만 내 가슴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버렸다.

그날 저녁, 아빠는 꼬인 혀로 365슈퍼에 전화해서 서른 병이나 들어있는 소주 한 박스를 집으로 배달시켰다. 슈퍼 아저씨가 아빠를 보고 술 중독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혀를 ‘쯧쯧’ 찼다.

“그럼 배달하지 말아야죠. 중독자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술을 팔 수 있어요?”

“이 녀석아, 나도 기분 안 좋아. 그렇다고 배달 안하면 술 사오라고 널 괴롭힐 거 아니냐. 응?”

안쓰러운 표정으로 옆에 서있던 앞집 아주머니가 엄마에게 말했다.

“금지엄마,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아무래도 금지아빠를 입원시켜서 치료받는 건 어떨까? 그냥 내버려두다가는 더 큰일이 생길 수도 있겠어. 딸래미를 봐서라도 말이야. 에휴.”

아빠는 술을 마시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술이라는 괴물이 아빠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엄마도 같은 생각을 했다. 술 마시는 아빠가 없는 곳이라면 다른 별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이다.

문을 열고 몇 계단 내려갔을까. 갑자기 아랫집에서 도흔이가 튀어나왔다. 귀찮기는 하지만 항상 옆에 그림자처럼 있어주는 도흔이 녀석, 그나마 코딱지만큼 위로가 되었다.

“도흔아, 아빠가 술을 계속 마시는 이유가 왠지 나 때문인 것 같아.”

“응? 그게 왜 너 때문이야?”

“글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심부름도 잘 안하고 말대답만 해서 그럴까?”

“흠, 네 말 대로라면 우리 아빠도 매일매일 술만 마셔야 될 것 같은데?”

도흔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을 발로 비벼댔다.

365슈퍼 앞을 지날 때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금지야, 아빠 병원에 가셨니?”

‘네. 아저씨가 아빠에게 술을 팔지 않았으면 아마 안 가셨을 거예요.’

속으로만 크게 외쳤다.

“네, 아저씨 때문이에요.”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소리 질렀다. 어딘가에 그렇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었다. 속으로 슈퍼 아저씨한테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가 배달한 건 사실이니까.

엄마가 아빠를 만나러 병원에 가자고 했다. 나는 아직 아빠를 만나기 싫었다. 더군다나 정신병원이라니. 엄마는 슬픈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엄마를 따라 나섰다. 왜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 거야? 울고 싶었다. 잠시 뒤 병원 직원과 함께 수척한 아빠가 가족면회실로 들어왔다.

“우리 딸 왔구나, 아빠가 정말 할 말이 없다. 엄마랑 잘 버텨줘서 고마워.”

아빠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심장이 터질듯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빠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없어.”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서려는데 흰 가운 입은 사람이 다가왔다. 아빠 담당 사회복지사라고 했다.

“네가 금지구나. 아빠가 네 이야기를 많이 하셨단다. 그동안 너를 힘들게 했다고 괴로워하셨어.”

“선생님. 아빠가 술 마시는 건 다 저 때문이에요.”

멈춰지지 않는 눈물이 쏟아졌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래.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술 마신 아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겠니. 네 탓이라도 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그리고 아빠는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매일 다짐하신단다. 앞으로도 너를 보면서 더욱 힘을 내실 수 있을 거야. 퇴원하시고 나면 네가 아빠를 위한 매일 처방전을 만들어 드리면 어떨까?”

그 때 아빠가 다가와 말했다.

“그래, 금지야. 아빠 잘못이 커. 아빠가 여기 선생님들과 상담하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했단다. 그동안 우리 금지를 힘들게 한 게 제일 가슴 아팠어. 지난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아주 뼈저리게 느꼈고. 아빠 다시 정비소에서 일할 거야. 아빠 일하면 술 안 마시는 거 알지? 이제부터 우리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게. 네 이름처럼 술은 절대로 금지하고 말이야.”

“아빠, 정말이야? 진짜로 그렇다면 새끼손가락 걸고, 복사하고, 도장도 찍어.”

“그래, 그래. 황금지. 사랑한다. 우리 딸.”

오랜만에 마음속 이야기들을 맘껏 나눴다. 아빠가 병원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잘 지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가 퇴원하면 광화문 광장에 함께 갈 것이다. TV 속 세상에 벌써 가 있는 것처럼 흐뭇한 미소가 절로 퍼져 나왔다.

어린이 책 작가교실은 2002년 시작된 어린이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내속의 잠재력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함께 궁리하는 평생배움터이다. 그동안 각종 공모전을 통하여 수많은 동화작가, 그림책작가, 논픽션 작가를 배출하였고 여러 출판사들과 손잡고 좋은 어린이 책을 펴냄으로써 어린이 책 세상에 짙푸른 숲을 이루어 가고 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