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동화] 실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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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동화] 실뜨기
  • 편집국
  • 승인 2017.05.1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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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성은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고되고 바쁜 삶을 살아가면서 그 마음을 잃었을 뿐 내면 깊숙한 곳엔 잃어버린 순수성이 잠들어 있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고 즐겁다. 본지는 이번 호부터 어린이 책 작가교실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한 편씩을 소개해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으로 바라 본 세상을 전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바쁜 일상으로부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가지길 바란다. <편집자 주>

 
실뜨기
김경숙 동화작가
 
할머니는 전화기만 바라보았습니다. 혹시 고장 났는가 싶어 앞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귀에 대보았습니다. ‘띠이.’ 신호가 떨어지는 게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딸이 뭐하느라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인지 야속하고 섭섭했습니다. 먼저 전화해 볼까? 손가락으로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다가 멈췄습니다.
‘아니지, 제가 먼저 하는 게 옳지.’
전화기를 내려놓고 마루로 나와 길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때 옆집에서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정신 사납게 웬 노랫소리람.”
할머니는 마당을 가로지르며 씩씩댔습니다. 낮은 담 너머로 옆집 마당을 들여다보자, 여자아이가 청승스레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어유, 속 시끄럽다. 넌 춥지도 않냐?”
여자아이가 놀란 얼굴로 올려다봅니다.
“어제, 어제. 이사 왔지요?”
버릇없이 어른이 묻는 말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아이의 뾰족한 턱과 까만 눈썹을 보자 왠지 노엽고 심술이 났습니다. 딸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맞다. 전화가 올지 모르는데.’
번뜩 스치는 생각에 휙 돌아섰습니다. 전화벨 소리가 설핏 들리는 것 같습니다. 마당을 가로질러 신발을 벗고 허둥지둥 문턱을 넘어서자 냉장고 소리만 우웅 크게 들렸습니다. 전화기를 들어 귀에 대 보았습니다. ‘띠이.’ 가슴 한가운데 명치가 찌르르 했습니다.
‘꼬마 때문에 전화를 못 받은 게야.’
휴대폰을 장만해 준다고 할 때, 필요 없다고 했는데 괜히 그랬다 싶습니다.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루로 나와 끄응 소리를 내며 앉았습니다. 옆집 아이의 노랫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벌겋게 녹이 슨 철 대문 앞에서 뚝 멈췄습니다. 대문이 살그머니 안으로 밀렸습니다. 아이가 고개를 빠끔 내밀었습니다.
“할머니요, 혼자 이사 왔어요?”
혼자 산다고 어린애도 괄시를 하나 싶어 할머니는 울컥 큰소리를 냈습니다.
“넌 왜 여기 왔냐?”
“숙제가 있는데요, 혼자 못해요. 선생님이 실뜨기 해보라고 숙제 내주셨는데요. 할머니가요, 가르쳐주세요.”
아이가 타박타박 걸어와 흰 무명실을 내밀었습니다.
“실뜨기?”
할머니는 아이를 내려다봤습니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했던 짓이랑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바닥으로 마루 한쪽을 가볍게 두들겼습니다.
“여 위로 와.”
아이가 마루 위로 올라왔습니다.
“한 번 해 보자. 우리 딸 어렸을 때 해 보긴 했는데.”
아이가 할머니 옆에 바투 다가앉아 손에 흰 무명실을 걸치고 박수치듯 했다가 넓게 벌렸습니다. 한 번씩 돌아가며 엉기게 감고 가운뎃손가락으로 다른 편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실을 잡아당겼습니다.
“넌 이름이 뭐냐?”
“은하요. 강은하. 일 학년이에요.”
할머니가 실을 받아 떠서 다시 앞으로 내밀자, 은하는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쩔쩔맸습니다.
“양 옆에서 가운데 실을 잡고 올렸다가 내려. 자, 다시 해 볼 테니까 잘 봐라.”
실을 풀어 손에 감으며 실뜨기를 하자 은하의 손가락이 다음 차례를 이었습니다. 다시 할머니가 실을 뜨고 은하는 또 몰라서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이번에는 니가 처음부터 해 봐.”
할머니 말에 은하는 실을 풀어 처음부분을 곧잘 해 냈습니다.
“그런데요, 할머니요, 고려장이 뭐예요?”
“고려장?”
“우리 엄마랑 아빠랑요, 그러는데요. 할머니는 고려장 할머니라던데요.”
“뭐어?”
할머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난 그런 거 아니다.”
할머니는 손바닥으로 마루를 퍼억 내리쳤습니다. 은하가 놀랐는지 발딱 일어나 마루 아래로 뛰어 내렸습니다. 신발을 제대로 찾지 못해 허둥지둥하다가 겨우 꿰신고는 가버렸습니다.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할머니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딸 일거야, 그럼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할머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서랍장 위의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대출을 해주겠다는 단조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고려장? 그럼 딸이 나를 버렸다는 건가? 고려장 같은 건 다른 사람들 얘기인 줄 알았습니다. 깊은 잠을 자려고 약을 사러 다닌다는 노인정 할머니 얘기를 들었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그 노인정 할머니에게 화를 내며 타박했는데 이젠 그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아니지, 그동안 비어 있던 이 집을 고른 것도, 고향으로 이사해서 시골생활을 해보겠다고 우긴 것도 내가 직접 정한 건데.”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꼭 벗겨진 살에 소독약을 들이부은 것처럼 쓰리고 화끈화끈했습니다. 후유, 숨을 내쉬며 눈길을 바닥으로 돌립니다. 마당에 은하가 흘리고 간 실이 눈에 띄었습니다.
“쯧쯧쯧…….”
할머니는 마당으로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검불이랑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엉뚱한 곳에 버려져 있는 게 꼭 자신처럼 느껴졌습니다. 실을 집어 들고 터덜터덜 걸어 마루로 돌아와 앉았습니다. 조심조심 털었는데 실이 얼크러졌습니다. 빨리 풀어내려고 손에 힘을 주자 결국 꽉 엉켜버렸습니다.
‘매듭을 풀어서 돌려줘야 할 텐데.’
단단한 매듭을 검지와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달래듯 비볐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매듭이 할머니의 손끝에서 느슨해졌습니다. 느슨한 곳을 이로 살살 비비자 동그라미가 크게 그려지며 매듭이 풀렸습니다. 하나가 풀리자 바로 또 하나가 풀리고 어느덧 매듭이 다 풀렸습니다. 그때 대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은하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실 찾으러 왔냐?”
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와 마루에 걸터앉았습니다. 그새 다시 집에 찾아온 은하를 보자 할머니는 어느새 마음이 스르르 풀립니다. 은하 엄마 아빠는 어디 가고 혼자 있는 걸까? 혼자 두고 일하러 나간 모양입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문득 딸아이 어릴 적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지쳐서 화를 내며 밀어내도 딸아이는 은하처럼 살갑게 다가오곤 했습니다. 은하 얼굴에 딸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그러자 은하가 딸처럼 여겨져 딱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아까 부르던 그 노래 한 번 더 불러 봐라.”
할머니 말에 은하가 발딱 일어서더니 무릎을 살짝살짝 굽히며 노래를 부릅니다.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
할머니는 마루 한 귀퉁이에 놓인 히터를 틀어 은하 쪽으로 돌려주었습니다. 낡은 히터에서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옵니다. 은하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할머니 따사로운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 멀리멀리 퍼져나갔습니다.
* 동요 - 섬집 아기
 
어린이 책 작가교실은 2002년 시작된 어린이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내속의 잠재력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함께 궁리하는 평생배움터이다. 그동안 각종 공모전을 통하여 수많은 동화작가, 그림책작가, 논픽션 작가를 배출하였고 여러 출판사들과 손잡고 좋은 어린이 책을 펴냄으로써 어린이 책 세상에 짙푸른 숲을 이루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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